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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버스 Sep 22. 2021

[벨기에] 돌비와 싸우는 음향기기 사업가

잠재적 영화 주인공을 만나게 된 사연

삼십 대가 되고서도 여전히 열정적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런 나를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든 인물이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정말 '열정적'이라고 느꼈던 사람, 바로 네덜란드 출장에서 만난 W다.

정확히는 passionate 보다는 frantic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때는 오디오 스타트업에서 일하던 2017년 겨울, 신기술이 소개되는 유럽의 한 테크 컨퍼런스에서 우리 제품을 소개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당시 살고 있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부터 네덜란드로 날아갔다.

부스를 꾸미기 위해서 배달된 자재들을 직접 조립했고, 컨퍼런스가 진행되는 5일 내내 점심도 샌드위치로 대충 때울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했다. 최대한 많은 컨퍼런스 참석자들에게 우리 제품을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가 선보인 제품에는 스페이셜 오디오(spatial audio)라는 공간감을 극대화하는 오디오 기술이 적용되어 있었는데, 백 마디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도 직접 고객에게 들려주는 게 효과적이었다.

부스 방문자들에게 VR 고글(전문 용어로는 HMD)을 씌우고 헤드셋을 통해 준비된 데모 사운드를 들려주면 대부분이 진짜 같은 사운드 경험에 감탄했다.

예를 들어, 공룡이 고객의 왼쪽편에 있으면 왼쪽에서 울음소리가 나다가도 고객이 그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공룡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면 소리가 자동적으로 앞에서 나는 기술이었다.

이미 한국과 미국에서도 고객 만족도가 높았기 때문에 우리 제품에 자신감이 있었고, 그 컨퍼런스에서 해당 연도 What Caught My Eye 상도 받았기 때문에 나는 한껏 들떠있었다.

시간을 내서 다른 오디오 전문 회사들(=경쟁사)의 부스도 방문해봤지만, 크게 감명받은 제품은 없었다.


그러다가 3일 차에 백발의 한 노인이 우리 부스에 방문했다. 그는 나를 포함해서 한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열심히 오디오 제품을 설명하는 것이 기특했는지 마지막 날 한번 더 우리 부스를 방문했다. 그러더니 자기 스튜디오에 초대할 테니 한번 놀러 오지 않겠냐는 것이다.

검색해보니 그는 오디오계의 애플인 돌비에 대적하는 부띠끄 오디오 전문 회사의 대표였다.

사실 오디오 업계는 돌비가 밸류체인의 전반을 꽉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어떤 회사이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유럽에서는 그의 회사가 어느 정도 입지가 있는 듯했다(돌비는 미국 회사이다).

그런 회사의 CEO가 직접 자기가 구축한 사운드 시스템의 소리를 꼭 들려주고 싶다는 말에 혹했지만, 그의 스튜디오가 네덜란드가 아닌 벨기에에 위치해 있기에 조금 난감해서 나와 동료는 망설였다.

나는 그가 그렇게 자랑하는 그 스튜디오를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심지어 그의 스튜디오는 우주의 이름을 딴 갤럭시 스튜디오였다! (필자는 우주 덕후임)

우리의 고민을 알았는지 그는 흔쾌히 자기 차로 나와 동료를 직접 태워주겠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컨퍼런스가 끝난 뒤 지친 것도 잊고 그의 차에 탔다.


그 당시 함께 갔던 나의 동료는 현재 유명한 스타트업에서 사업개발을 담당하는 씩씩한 여성이다. (2조원에 인수된 한국 스타트업..)

당시 우리는 낯선 사람의 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오디오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로서 참 럭키하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차알못이라서 그의 차가 무슨 브랜드였는지는 모르겠다. 무슨 차였는지 알았더라도  때와 똑같은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가 직접 차의 사운드 시스템을 개조했기 때문에.

그의 차 스피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차에서 이런 전율을 느낄 수가 있다고? 나와 동료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심지어 그가 차에서 튼 음악은 너무나 낯선 장르였다. 오페라 같기도 하고 종교 음악 같기도 한 이상한 음악이었다. 나중에야 그 음악을 찾아서 유튜브로 들어봤는데, 아쉽게도 당시의 사운드를 재현하기엔 내 휴대폰은 너무 소박한 기기였다.


그렇게 얼떨떨한 상태로 두 시간을 달렸더니 그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회사의 헤드쿼터가 곧 스튜디오였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저녁 시간이어서 투어를 도와줄 최소 인력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13.1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 강당으로 안내되었다. (참고로 흔히 말하는 '돌비 서라운드 시스템'은 7.1 혹은 9.1이다.) 그런데 고차원의 사운드 시스템보다도 놀라운 것은 바로 스크린에서 나오는 영상의 내용이었다.

자고로 회사 소개 영상이란 따분한 게 정상이지 않은가. 설립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회사의 역사에 어떠한 부침이 있었는지, 그를 극복해낸 구성원들의 노력이 얼마나 숭고했는지 등등..

그러나 그 영상은 오직 설립자 한 사람의 오디오 광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있는 그 건물은 최고의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 바닥부터 지붕까지 특수 제작된 건물이었다. 진폭이 최대가 되도록 지하 깊은 곳까지 땅을 파고, 특수 재료로 지어 올려진 세상에 하나뿐인, 건축가들이 깨나 고생하며 지은 회사 대표의 고집이 만들어 낸 건물이었다.


영상을 보고 나서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텅 빈 홀로 안내되었다. 그랜드 피아노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대표가 씩 웃으면서 의자에 앉아 직접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났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소리만으로 이렇게 감동을 받을 수 있다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울림이었다.

연주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런 소리를 죽기 전에 들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내가 음악에 대단한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싼 오디오 기기만 사용하는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서 더 감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오디오 전문가였더라도 그 소리는, 그리고 그 소리를 내기 위해서 설계된 모든 장치들에는 감탄을 했을 것이다. 바닥의 재질, 창의 크기, 천장의 높이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소리를 뿜어내기 위해 고안된 곳이었다.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마침 맥도널드 CEO의 이야기를 다룬 '파운더'라는 영화를 봐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가 영화화된다면 이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사람의 귀는 정말 신비로운 인체 조직이라서 청각이 시각보다 훨씬 예민하다고 한다. 귀로 느끼는 이 감각이 그 어떤 감각보다도 빠르게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의 행보가 더 궁금해졌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소리의 끝판왕을 구현하고자 오디오 포맷 자체를 새롭게 정의해버리연구자이자,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그 기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업가이기도 한 사람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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