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팡팡 돌아가는 경험을 해볼뻔한 사연
암스테르담으로 출장을 가는 김에 휴가를 붙여 써서 네덜란드에 3박 4일 더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편하게 호텔에 머물려고 했지만, 한 에어비앤비를 발견하고 몹시 고민을 하다가 예약을 해버렸다. (그때 내 취미는 전 세계에 있는 특이한 에어비앤비 집을 위시리스트에 담는 거였다.)
당시 나는 미국에서 여러 에어비앤비에 장기 투숙하며 호스트와의 마찰에 피로해져 있는 상태였다.
호스트도 게스트한테 별점을 매길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마 내 별점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라 장담한다.
16시간 시차가 있는 한국과 일을 했기 때문에, 퇴근하고도 집에 와서 밤마다 컨퍼런스 콜을 하기 일쑤였는데 호스트와 같이 사는 에어비앤비에서는 이게 문제가 되는 거다.
특히 조용한 빌리지에 위치해있던 한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는 항상 나에게 화가 나있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집이었는지 내가 떠드는(?) 소리 때문에 잠을 자기 힘들다는 거다.
10시부터 잠을 자본적이 없어서 나로선 억울했지만 호스트가 싫으면 게스트가 떠나야 하기에, 그리고 미국에선 밤에 갈만한 카페나 다른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눈물을 머금고 조기 퇴실했다. 그 이후부터는 혼자 쓸 수 있는 집만 예약했다.
암스테르담의 이 작은 집은 "집 전체"를 편하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방 한 칸"만 사용할 수 있었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게이 커플인 호스트가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화이트 톤+목재 가구로 꾸민 깔끔한 인테리어에 실내 테라스에는 불상과 식물이 있고 자전거까지 쓸 수 있었다.
내가 상상한 영화 같은 네덜란드 여행을 완성시켜줄 수 있을 것만 같은 숙소였다.
체크인하는 날, 나는 이 나라에서 '내가 해야 할 일(출장)'은 모두 끝났기 때문에 오늘부터 4일 동안은 '하고 싶은 일(관광)‘만 하면 된다며 씩씩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싱긋 웃으며 F와 R은 뭐가 하고 싶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원래 웃는 상이었다.)
반 고흐 미술관처럼 필수 관광지도 물론 가봐야겠지만 나는 차를 렌트해서 Giethoorn(히트호른)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구멍 뽕뽕 뚫린 케이크 모양의 치즈를 사고, 운하에서 배를 탈거라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도 가본 적 없는 곳이라고 했다. (한국으로 치면 전주한옥마을 보다도 덜 알려진 경주한옥마을 같은 곳이려나)
한국에는 '네덜란드의 동화마을'로 소개된 곳이고 트립어드바이저 후기를 보면 전 세계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곳 같았는데 현지인은 잘 모른다길래 조금 의외였다.
히트호른은 예상대로 그림같이 예쁜 타운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더 생각나는 건 출발하는 길과 돌아오는 길이다. literally 길.
출발부터 말썽이었다. 아침 일찍 렌터카 회사 차고에서 차를 출발시켜서 나왔는데 한 20m 차가 움직이더니 그대로 멈춰버린 거다.
나는 멘탈이 붕괴되었다. 골목길도 아닌 곳에서 내 차가 도로를 막고 있었다.
차고에서 나오자마자 우회전을 해서 우측 차선에 붙어야 하는데, 우회전하기 전에 차 머리만 도로에 반쯤 걸친 상태로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차가 정지해버렸다.
내 왼쪽 창문 너머로는 버스가 진행 방향을 가로막은 내 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렌터카 직원은 이미 실내로 들어간 상태였다. 버스 아저씨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하라는, 침착하라는 손짓을 했다.
'비현실적이네. 버스 아저씨가 이렇게 친절하다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더니 지나가던 행인이 혹시 사이드 브레이크가 걸린 거 아니냐며 확인해보라고 해서.. 다행히 사태는 종결되었다.
돌아오는 길도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게, 고속도로 옆에 생전 처음 보는 초대형 풍차들이 즐비해있었다.
하얀색 얄쌍한 바람개비같이 생긴 거대한 풍차들 몇백 개가 주욱 이어지는 광경을 보고 내가 거인국에 놀러 온 미니어처가 된 기분이었다.
사진으로 꼭 남기고 싶었는데 고속도로를 혼자서 달려야 해서 너무나 아쉬웠다. 운전 초보에게 130킬로의 속도는 그저 너무 아찔했다.
무사히 숙소로 돌아온 그날 밤 F와 R에게 Giethoorn에서 사 온 달걀 받침대와 3가지 맛 치즈 세트를 선물로 줬다. 외국인한테 전통 마을의 기념품을 선물 받은 그들은 빵 터졌다. 그리고 내일은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매직머쉬룸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F의 눈이 커졌다.
나는 마약이 전면 금지된 한국에서 태어났는데 미국에서는 대마 정도는 치료제로 사용된다고 부연 설명을 하면서, 법이란 결국 특정 집단이 합의한 사회 제도 아니냐고 주장을 펼쳤다.
나는 지금 네덜란드 사회에 있으니 네덜란드 사회 구성원들이 따르는 법을 따라야겠다며 매직머쉬룸을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F의 순한 사슴 같은 눈망울이 차가워지면서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미국인이라면 모를까, 매직머쉬룸은 너무 위험하다는 거다.
약한 마약도 안 해본 사람이 그런 강한 마약을 하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나의 호스트이자 친구로서 반대한다고 했다.
내가 호텔에 묵었다면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을 텐데 괜히 에어비앤비에 묵어서 이렇게 위시리스트를 포기하는구나 아쉽긴 했지만 F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괜히 무서워져서 매직머쉬룸의 후기만 좀 들려달라고 했다.
F는 무지개를 본다고 했고 R은 세상이 아바타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정말 강한 환각제이다 보니 몸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했다.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정신을 한동안 잃는 것도 몸에 심각한 상해를 입히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매직머쉬룸은 네덜란드 사람들한테도 쉬운 놈이 아니었던 거다. 네덜란드에선 coffee shop이 대마초를 피는 곳이라길래 Dutch는 전부 약쟁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이었나 보다.
F의 직업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기 때문에 예술 작업을 하려면 그런 약이 좀 도움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F는 그럴 수도 있지만, 자기는 그래서 더 명상을 한다며 테라스에 있던 불상 얘기로 화제를 옮겼다.
다음 날 무난하게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시내에 있는 기념품 샵에 들렸다.
티셔츠에 대마를 말아 피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져 있었고, cannabis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이 정도는 장난 수준 아닌가 싶어서 슬쩍 집었다가, 네덜란드에서 입국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미국 공항에서 무작위로 마약 테스트를 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다시 내려놨다. 소중한 내 비자를 잃을 수는 없었다.
매직머쉬룸 간판을 단 가게들도 보이길래 사진은 괜찮겠지? 싶어서 찍었다가 공항에서 괜히 휴대폰 검사 당할까봐 긴장하고 말았다.
R과는 페이스북 친구를 맺어서 여행 이후로도 간간이 소식을 들었는데, 최근 디즈니로 이직을 했다더라.
그가 요즘도 명상을 하면서 영감을 얻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