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단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처음 사업을 시작한 이유중 하나는 청년들에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가치, 경험을 들려주고 꿈을 꿀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였고. 두 번째 이유는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였다. 지금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만 망설여지고, 혹은 주변 환경이 안 따라준다면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한 번 생각해보자.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아직 한 번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오늘은 지금까지 어떻게 성장하고 발전했는지, 그리고 간단하게 인생의 전환점이 어떤 계기로 만들어졌고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말해보려고 한다. 주변에 친한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자세히 모르는 이야기.
이야기를 위해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도 안나는 2살 시절로 돌아간다. 지금은 기억도 없이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일부를 함께 생활한 외할머니께 들은 이야기다. 그 당시 무슨 이유로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는지 이유도 모른 채 그냥 혼자 좋다며 동네에서 놀곤 했었다. 몇 개월인지 몇 년인지 가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지내게 됐다. 성인이 되고 들은 이야기로는 지금은 내가 첫째로 있지만 원래 나는 둘째였다고 한다. 그 당시 2살이었던 내가 감기에 걸려 매일같이 마중 나가던 누나를 딱 그날 나가지 못했다. 결국 지금도 매일같이 지나가는 시청 길목 앞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날 누나는 하늘나라로 갔다. 결국 그날따라 유독 아팠던 나 때문에 사고를 당했다는 생각으로 집에선 꽤 미움받기 시작했고, 결국 어머니가 병원에 다니는 동안 할머니 손에 키워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굉장히 화목하고 재미있는 가정에 있었지만 그 당시엔 그랬다고 한다. 조심스럽게 누나의 이야기를 꺼내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했는데도 안치실에 누워있던 누나는 상처하나 없이 멀쩡했다고 한다. 유치원 시절에 가장 크게 기억에 남는 내 이야기다. 누나의 사진은 외할머니를 통해 22살쯤 됐을 때 처음 봤다. 아마 지금 옆에 있었으면 꽤 예쁘게 컸을 텐데.
그렇게 어린 시절을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름 초등학교 땐 우리 집도 있었고 부족하긴 했지만 꽤 화목하게 살았다. 아직도 어린 시절 집이 기억나고 레고를 가지고 놀던 모습도 기억한다. 평범한 가정을 느끼고 지내다 초등학교 4학년~5학년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이 많아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에 빨간색 스티커가 잔뜩 붙기 시작했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마냥 좋다며 친구들과 놀기 바빴고 우리 집이 이렇게 심각해질 줄 아무것도 몰랐다. 결국 보증을 잘 못서서 집에서 쫓겨나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까지 10번이 넘어가는 이사를 다니면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부모 가정이 꽤 많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한 반에 1~2명 정도 있을까 말까 했다. 결국 서울부터 목포, 경기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값싼 월세를 찾아다녀 살기 시작했다.
이혼이라는 걸 느끼고 중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그래도 저소득층으로 기초생활수급자로 국가에서 조금씩 돈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집이 어렵다는 걸 느끼고 그때부터 경제관념이 생기기 시작하고 돈을 아끼기 시작했던 거 같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급식을 먹어야 하는데 급식비가 꽤 비싸다고 생각하고 신청하지 않았다. 어머니께 말하면 부담이 될까 봐 이야기도 못했고, 하루 1끼 정도만 먹어도 충분히 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며칠 굶다 보니 담임선생님이 불러내 이야기를 했다. 왜 급식을 신청 안 했니? 그 말에 돈이 없다고 하긴 그랬고 자존심 세우며 그냥 먹기 싫어서 안 했다고 대답했다. 결국 한 달 정도는 버스비를 아껴가며 매점에서 빵을 사 먹곤 했다. 그 당시 청소년 버스비가 700원쯤 했을 거다. 왕복 버스비를 아끼면 1400원이 생겼고, 집까지는 1시간이 넘는 거리를 왕복하면 됐다. 그냥 그렇게 참다 보니 또다시 담임선생님이 따로 불러냈고, 한 달 식권을 주시며 "이번 달 급식비는 식권이 남아서 선생님이 줄 테니 친구들하고 밥 같이 먹어"라며 말해주셨다. 아직까지 정말 식권이 남았던 건지 선생님이 사주셨던 건지 모른다. 하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나는 선생님이라는 꿈을 좀 더 확고하게 가질 수 있게 됐다. 결국 식권 이야기는 어머니께 전달됐고, 어떻게든 밥은 잘 먹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도 역시나 목포까지 이사를 갔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 집에 살았는데 그 아저씨는 자기를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결국 아빠라고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아저씨와 몇 개월간 같이 살게 됐다. 목포로 갔던 기억은 내 기억 속에서 꽤 안 좋았던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 당시 같이 있던 형에게 거짓말을 배웠고, 남자들이 흔히 보는 야동을 접하게 됐다. 산타가 없다는 이야기와 거짓말, 그리고 야동이라는 단어는 목포에 갔던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접하고 배웠던 거 같다. 그렇기에 꽤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난하게 목포에서 중학교 3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다시 2학기쯤 서울로 왔다. 마치 같은 학교로 복학한 듯 2년의 공백기 끝에 다시 내가 원래 다니던 학교로 돌아와 졸업하게 됐다. 그때 기억으로 목포에 있었던 아저씨가 늦은 밤 우리 가족이 살던 서울 집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쳐 경찰까지 불렀던 기억도 조금 떠오른다.
뭐 나름 어렵다면 어렵게 중학교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때는 게임에 정말 미쳐있었다. '카오스'라는 게임 준프로 수준까지 활동할 정도로 게임에 빠졌고 꽤 열심히 했었다. 없는 집안에서 용돈도 받아가며 하루 종일 PC방에서 살기 시작했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고1을 게임만 하면서 지내다 어떤 계기가 찾아온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집안과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지고 설상가상으로 어려움이 몰려왔다. 결국 집안은 책임지려면 나부터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고2부터 조금씩 공부를 시작했다. 적응이 안됐기에 공부를 쉽게 할 수 없었고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결국 과외를 보내달라며 떼쓰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과외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15만 원 정도 했던 그룹과외라 몇 개월 동안 다닐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역시나 집이 어려워 결국 과외도 그만둘 상황에 놓였다. 결국 이번에도 자존심 세우며 과외선생님께 이제 혼자 공부하겠다며 과외를 그만둔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날 선생님은 옆방에 나를 조용히 불러내고 왜 과외를 그만두려는지 알고 있으니 과외비 걱정하지 말고 다니라고 말씀해주셨다. 결국 그날 과외시간 동안 옆방에서 혼자 30분을 울고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다행인지 그 이후에 봤던 시험에서 수학을 100점 맞았던 기억이 난다. 이날 선생님이라는 꿈이 더 확고해졌다.
내 인생의 절반이 조금 넘는 청소년 시기의 이야기다. 나는 어려서 가족을 잃었고, 그로 인해 부모의 손에 키워져야 할 나이에 외할머니와 함께 자랐다. 그리곤 가정문제로 집을 잃고 부모님은 이혼하게 됐으며, 없는 돈에 꾸역꾸역 아껴가며 성장해왔다. 그 외에도 몇 개월 동안 집도 없어서 모텔에서 살았던 기억도, 보일러가 끊켜 차가운 바닥에서 자며 가족 모두가 감기에 걸렸던 기억도 있다. 이처럼 나름 어렵다면 꽤 어렵게 생활했다. 물론 세상엔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만약 평범한 가정이라면, 그리고 지금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조금은 주변을 둘러봤으면 좋겠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다. 어려울 때마다 정말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창업을 시작한 이유는 대표라는 허울?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런 이유가 아니다. 내가 성공하면 나보다 조금은 더 괜찮은 상황인, 나보다 조금은 앞서 나간 청소년, 청년들은 나보다 더 멋있게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증명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 나간다. 그러니 부디 어렵다고, 힘들다고 주저앉지 말아라. 네가 닦아온 그 길을 따라 걸어온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멋있고 예쁜 길을 만들어주자. 눈앞에 있는 안 보이는 벽 따위 당당하게 깨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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