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시간의 윤색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by 김조안

그 젊은이는 맨 방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울었다


맨방바닥에서 꽃무늬 요가 퍼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94,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든다. 사랑과 시간의 윤색을 참 담담하게 담아낸다. 때를 알고 떨어지는 낙과는 자연의 이치다. 분분한 낙화는 아름답다고 했지만, 그 낙화는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랑과 상처의 기억이 될 수도 있다. 생을 전전하기 위한 거처였던 지하방은 사랑을 탐구하는 장소였지만, 동시에 아무도 머물 수 없는 빈방이 됐다. 사랑은 낙과처럼 여물 수 있을까. 이별은 낙과처럼 아름다울 수 있나. 찬란한 슬픔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