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졸업식

by 푸하퐁

1월은 본격적인 졸업시즌이다. 내가 기억하는 졸업식 시즌은 2월이었는데, 요즘은 겨울방학과 동시에 졸업식을 진행하는 것이 관례가 된듯하다. 강아지 가족들을 데리고 산책을 하다 보면 집 근처에 있는 학교 교문에 대문짝만 한 현수막이 걸리기 때문에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문구를 볼 때마다 나는 혼자 부끄러움을 삼킨다.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나의 졸업사진들은 모두 부모님 댁 장롱 깊숙한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기억 속의 첫 번째 졸업이었던 초등학교 졸업식 날, 모르는 누군가가 찍어준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자신의 소중한 아이의 앞날에 축복을 주려던 또 다른 학부모님께 엄마가 부탁해서 얻은 것이었다. 새롭게 개발되는 아파트 단지에 1년 전 개교한 초등학교의 1회 졸업생이었던지라 학교 건물조차 깔끔하기가 지나쳐 차가울 정도로 보였다. 지금은 꽤나 학생수가 늘었지만 그때 졸업생은 단 2개 학급이었고, 추운 겨울 날씨에 걸맞는 휑한 분위기가 물씬 났는데 그 와중에 나의 졸업식에 와준 가족은 엄마 단 한 사람이었다. 2인 가구였냐하면 그렇진 않다. 우리 가족은 네 식구였는데, 그날 엄마만 참석한 건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아빠는 당시 지방에 계셨을 것 같다. 때는 IMF 여파로 집이 어려워진 이후였고, 그 무렵 아빠는 빚쟁이들을 피해 다니며 근근이 일용직을 전전하셨다. 아마도 그날 역시 지방에 계셨던 게 아닐까? 엄마는 내 초등학교 졸업식을 생각하면 미안하다고 하시며 그날 왜 엄마 밖에 안 왔는지 설명해 준 적이 있었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신 그때 집이 힘들어진 게 누구 탓인지에 대해 수도 없이 들었던 것만 기억이 날 뿐이다.


시간은 흘러 중학교 3학년. 집안 사정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지만, 아빠는 공사장에서 일한 지 몇 년째가 되어 있었다. 공사장 인부는 누구나 그러하듯 날씨와 계절을 많이 타는 일이었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운 때는 공사가 중단이고,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빠는 우리의 방학시즌과 엇비슷하게 어쩔 수 없는 근무방학을 가지곤 하셨다. 아빠가 집에서 쉬고 있는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집안 분위기는 좋지 않아 졌는데, 그건 가계 수입이 줄어들 때마다 엄마가 극도로 예민해지고, 부부 사이가 날카로워지며 그에 따라 자식들은 눈치를 봐야 하는 그런 날의 반복이기 때문이었다. 사춘기 동안 아빠가 얼마나 능력이 없는지, 결혼이 얼마나 손해인지 등에 대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가뜩이나 사춘기가 되면 부모님에 대해 반항심이 들기 마련이지 않던가. 호르몬과 주입식 이야기의 시너지 효과로 나는 당시 아빠에 대한 엄청난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엄마에 대해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지만 아빠에 대한 적대감은 꽤나 심했다. 대놓고 대들은 적은 없지만 속으로 어찌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아빠와 나는 둘 다 말 수가 적은 편이라 집 안에 하루 종일 있어도 대화 한 마디 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거의 대부분은 그런 날이었다.


중학교 졸업식의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아빠한테는 말도 꺼내지 않았고, 엄마에게 대신 말을 전했다.

아빠는 졸업식에 안 오셔도 괜찮다고.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오시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그때쯤 아빠는 건설현장에 적합한 6인승 더블캡 트럭이나 스타렉스 승합차 같은 종류를 중고로 바꾸며 타셨다. 용도가 용도이니 만큼 차는 늘 흙먼지와 쇳덩이 장비들로 가득했고, 차는 새로 뽑아서 하루만 지나도 중고라는 신념에 따라 중고차만 고집하다 보니 녹이 슨 부분들도 상당히 많았다. 어쩌다가 가족을 태우는 날이면 그 낡은 차일지라도 열심히 닦아두시곤 했다. 물론 실내의 흙모래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나는 그런 아빠 차가 창피했다.

아빠는 키가 작은 편이셨다. 여성 키라고 해도 작은 축에 속했다. 청일점인 아빠를 포함한 우리 네 식구 중에 아빠 키가 가장 작았다. 얼굴도 작고 눈매는 또렷해서 소싯적에는 예쁘장한 얼굴이라는 소리도 꽤나 들으셨나 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예쁜 이목구비만 주면 좋으셨을 텐데, 작은 키와 더불어 또 하나 '주지 말았어야 할 유전자'를 더 남겨주셨다. 바로 탈모다. 아빠 나이 서른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머리가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금 내 머리는 가뿐히 생머리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아빠는 심한 악성 곱슬머리였던 탓에 어떤 헤어스타일도 감히 시도할 수 없어 일찍이부터 중절모를 중요한 패션아이템으로 삼으셨다. 그런 아빠가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에서 무거운 자재를 나르는 일을 하게 된 후로 까맣고 거칠거칠한 작은 알감자처럼 되었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작은 알감자가 된 아빠가 나는 창피했다.


아빠를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창피하다는 건 당시의 나도 알고는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했다. 기껏 둘러댄다는 말이라고는 "아빠 바쁘니까"라든지 "졸업식 별 것도 아닌데 뭐 온 가족이 다 와?"라는 식이었다. 당연하게도 겨울이라 아빠가 바쁠 리는 없었다. 엄마는 아마 어렵게 아빠에게 그 말을 전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빠인데 졸업식 가셔야 하지 않겠냐고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흑염룡을 열댓 마리쯤 품고 있던 나에게 엄마의 말은 근거가 하나도 없는 억지 논리에 불과했다. 근거 없는 억지 대마왕은 나였으면서 나는 졸업식 날 창피한 아빠를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날 선 고슴도치처럼 굴었다. 일말의 양심이 있었던 것일까. 이제와 생각하면 정말 다행스럽게도 졸업식 직전에 마음을 바꿨다. "안 바쁘면 아빠도 오시라고 하든가" 같이 어정쩡한 말로 대충 무마했었다. 분명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아빠는 내가 창피해 한 아빠 차에 가족들을 태우고 졸업식에 참석하셨다. 내 기억으로는 학교 운동장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오셨었다. 내가 친구들과 이별의 인사를 하며 괜히 바쁜 척 학교에서의 마무리를 하고 있을 때, 아빠는 늘 그렇듯 뒷짐을 지고 나로부터 몇 미터는 떨어진 곳에 쓸쓸히 서 있었다. 어찌저찌 아빠를 졸업식에 오시라고는 했지만 나는 최대한 아빠가 안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아무에게도 "우리 아빠야"라고 소개하지 않았고, 아빠에게 아무도 "아빠, 얘가 내 친구야"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아빠는 그날 그 자리에서 무슨 마음이었을까..


고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을 때, 이번에는 엄마가 먼저 물어왔다.

"아빠도 가셔도 되지?"
"당연한 거 아님?"


입 속의 가시처럼 3년간 나를 지그시 괴롭히던 일을 청산해야 할 때였다. 엄마의 질문에는 주저함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내가 고슴도치처럼 굴면 어쩌나, 아빠에게 또 어떻게 말해야 하나 등의 우려가 섞인 터였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달라졌다. '물을 걸 물어'라는 식의 퉁명스러운 대답은 오히려 엄마를 안도하게 했다. 사춘기가 완전히 지나간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뜨거운 콧바람을 내뿜는 흑염룡 한 마리 정도가 내 안에 있었지만, 이 대답을 꽤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의 차는 3년 전과 달라지지 않았고 구운 알감자 같던 아빠가 이제 더 그을리고 반질반질한 '탄 알감자'가 되었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아빠는 졸업식장에 누구보다 일찍 도착해 마치 당연한 듯 멀찍이 서서 뒷짐을 지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를 부르고, 손짓하고, 달려가서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다.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를 소개하고 아빠에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을 소개했다. 아무도 우리 아빠를 창피해하지 않았다. 아마 3년 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친구들 부모님을 관찰하고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걸 그렇게 늦게 알아버렸다.


이제 졸업시즌이 지나고 나면 곧이어 학교 앞은 입학을 축하하는 현수막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한동안 부끄러운 나의 졸업식을 생각의 깊은 곳에 다시 넣어두었다가 내년 이맘때쯤 또다시 꺼내야 할 것이다. 얼어버린 겨울 운동장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마냥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걷고 있던 아빠에게, 나는 매년 사과하고 또 사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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