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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Nov 03. 2024

<직업은 있지만 직장은 없습니다>

8화. 모든 순간 영화처럼

가끔은 불운이 나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갔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 있다.

그래도 나의 행운의 여신은 늘 잘 지켜보고 있어 주는 것인지 그 불운을 정면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불운들이 나를 완전히 피해가지는 않았다.

2011년은 내 기억 속에서 무엇을 해도 참 힘겨웠던 한 해였다.

아.. 사는 것이 이렇게도 힘이 들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 만큼 모든 것이 밑바닥을 치고 또 쳐서 내 안의 모든 기운을 끌어 모아서 버텨냈다.


그 중심에는 생각하기도 싫은 영화 한 편이 있다.

영화인 김해인 씨와 살다 보니 인생의 모든 챕터들이 늘 영화와 함께 얽혀있다.

그 때문인지 가끔씩 난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곤 하는데 그런 생각은 행복한 순간보다는 힘이 들거나 고난이 찾아오는 순간에 더 빛을 발한다.

모든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모든 역경을 씩씩하게 넘고 넘어 그래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기 때문이다.

나도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모든 일이 해결되고 그래서 잘 살았답니다, 끝날 것이라는 믿음.


최악의 한 해, 최악의 영화이니 제목은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그 영화를 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빠져나오려고 애를 써도 이상하게 등에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고 우리를 쫓아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영화 촬영 도중 사고가 터졌다.

폭파 장면에서 사고가 생겨서 촬영부가 크게 다칠 뻔하여 촬영부 전원이 더는 이 촬영은 못하겠다고 일을 중단된 것이다.

당시 김해인 씨는 촬영부 조수였는데, 심지어 퍼스트도 아닌 기껏해야 세컨이었을텐데,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현장에서는 늘 맨 앞에서 주먹을 쥐고 가장 큰 목소리로 총대를 짊어지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건 타고난 천성인 건가, 이렇게 모든 투쟁의 현장의 맨 앞엔 늘 빠지지 않는 사람이어서 뿌듯한 마음과 더불어 나는 늘 가슴조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너무나 소심한 간이 작은 사람이므로.

김해인 씨는 지금까지도 무슨 일만 생기면 늘 협상과 투쟁의 맨 앞에 서있다. 좀처럼 물러서거나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사느라 늘 조마조마 가슴 조리는건 영원한 내 몫이구나 싶다.



그렇게 모든 일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이 힘들었던 한 해의 마지막 날, 나는 동네 상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머리를 자르면 불운들이 다 빠져나갈 거라는 흔해 빠진 믿음 같은 것을 마음에 품고말이다.

그런데 대 폭망으로 이런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라고? 이런 스타일이 되어 버려서 나는 미용실을 나서며 엉엉엉엉 소리내어서 울었다.

올해는 머리 자르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된다고, 일 년을 참았던 눈물을 다 쏟아내듯이 울고 또 울었다.

그 시간이 12월 31일 저녁 8시였다.

울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김해인 씨는 홍대의 미용실 리스트를 뽑아 계속 전화를 걸어서 지금 가면 파마를 해 줄 수 있을지 물었다.

한해의 마지막 날이고 시간도 늦어서 해주겠다는 곳이 없었지만 포기를 모르는 김해인 씨는 전국의 모든 미용실에 전화를 걸 기세로 한참을 전화를 걸었다.

덕분에 12월 31일 밤 12시, 가족이 쪼르륵 홍대의 미용실에 앉아서 내가 파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엉엉 울며 들어오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아님 정말 솜씨 좋은 미용사였는지 미용실을 나설 때는 머리가 너무 마음에 들고 예뻐서 새롭게 태어난 그런 기분이 되어서 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김해인 씨는 이야기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일로는 울지 말고 살자.

우리는 2012년이 시작되는 새벽, 작은 우동가게에서 우동을 호호 불어 먹으며 소설 우동 한그릇 속에 들어온 곳 같다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대마도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오고 신기하게 좋은 일이 자꾸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시 여행의 끝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니까.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짧아진 머리로 급히 떠났던 대마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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