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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a Jun 06. 2023

영알못 물리치료사워홀러의 첫 활동, 시니어센터 봉사

캐나다 노인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나는 어릴 적부터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있었다. 어릴 적 해외 생활을 해본 분, 해외에서 학교를 다닌 분, 어학연수를 다녀와본 분, 해외에서 물리치료사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해외 세미나, 해외봉사를 참가한 선생님들, 심지어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적이 있었던 사람들 모두. 해외에서 생활하고 경험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동경하는 부분들을 이루고 있는 분들이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대단해 보였다. 28년 동안 다른 사람이야기라고만 생각해 왔다. 그 꿈을 가슴속에 품고만 살았다.

'어떻게 내가 하겠어. 나는 영어 단 한마디도 못 하고, 갈 형편도 안 되는 걸.' 매번 이런 생각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2023년 1월 30일 캐나다 밴쿠버로 오면서 우러러만 보았던 그 삶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토록 갈망하던 삶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던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궁금한 부분들도 많았다. 1년이라는 기간이었지만, 가기 전부터 짧지 않을까? 생각했고 비자 연장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물리치료학과 학생이었던 나는 미국, 캐나다, 독일 등 일찍부터 '재활'분야가 발달했던 나라들은 특별한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이 나라들은 물리치료사 '단독개업'이 가능한 나라였다. 무슨 교육이든지 외국에서 시작되었고, 외국에서 한국으로 초빙이 되었다.

해외에서의 '물리치료'영역은 어떨까? , '재활'분야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을까? , 나아가 해외의 노인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장애인 자식을 둔 부모는 해외로의 이민을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어왔다. 해외엔 어떤 특별한 것이 있길래? 특히, 캐나다는 이민을 많이 오는 나라였다.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는 환경으로 간다. 너무 설레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분야를 접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았다.


캐나다에선 한국물리치료사 면허로 일을 할 수 없었다. 대신 다른 헬스케어분야로 활동이 가능했다. 시작부터 물리치료사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내 영어실력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천천히 나아가자고 생각했다. 그럼 처음부터 접할 수 있는 방법엔 무엇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봉사'라는 영역이 있었다. 캐나다는 특히, '자원봉사' 분야가 많이 활성화된 나라라고 했다. 많은 기관이나 단체에 자원봉사를 통해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한국에서부터 내가 할 수 있는 봉사를 알아보았다. 한국에서 알아볼 땐 많은 한계가 있었다. 신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휴대폰번호가 없었고, 주소가 없었다. 그렇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출국 전 바쁜 상황들에 치여 어영부영 밴쿠버로 떠나왔다.

밴쿠버에 도착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밴쿠버공공도서관에서 자원봉사자 모집한다는 포스터를 보았고, 자연스럽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신청하려 했던 기관은 어느새 잊고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시니어 센터'에 자원봉사 면접을 보러 가게 되었다. 말이 면접이지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는 시간이었다. 어떤 포지션에 관심이 있는지, 언제 올 수 있는지, 얼마나 올 수 있는지, 학생인지, 직업이 있다면 어떤 직업인지 이런 간단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밴쿠버 온 지 2주 후였다. 정말 그땐, 아무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봉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나의 '공식적인 첫 활동'이 시작되었다.


'시니어 센터'는 대한민국으로 치면 노인경로당, 노인복지관, 노인센터 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편할 듯하다. 캐나다의 시니어 센터는 노인들을 위한 사회적인 모임과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이다. 센터에서는 노인들에게 운동, 교육, 다양한 문화활동을 제공한다.  

나는 '시니어 센터'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제공했다. 주로 점심시간 음식 서빙을 했는데, 그 외에도 미술프로그램 어시스트, 헬스케어프로그램 어시스트로 참여하기도 하고, 행사가 있는 날이면 정리와 청소를 돕기도 하는 등 우리나라에서 하는 봉사활동과 비슷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200 시간 이상의 봉사시간이 있어야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대학 1,2, 3학년 때까지 요양원과 방문봉사를 꾸준히 다녔다.)



시니어센터에서 봉사를 하며 캐나다의 노인들의 생활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정말 다른 점, 이곳에서는 움직임이 조금 불편할지언정 본인 혼자 스스로 하는 것이 당연한 나라였다.

봉사하는 첫날, 어떤 할머니가 워커를 끌고 다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에게 화장실을 가야 해서 일어나야 하니 저기 끝에 세워진 워커를 본인에게 가져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가져다주었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 가는 길, 문 여는 것까지 도와주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이 화장실에서 돌아올 때까지 문을 열어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런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나를 기다렸냐는 듯 땡큐 하며 본인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한국 병원에서 근무하며 하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첫날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노인들은 다른 연령에 비해 신체적인 부분이 많이 약해져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한국에서는 비교적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는 노인들이어야만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사람들. 특히 독립적인 보행, 또는 움직임이 불편한 분들은 집에서 잘 나오지 않거나, 병원생활, 요양원생활을 주로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반면, 캐나다 시니어 센터에서는 한국에 있었더라면 병원생활을 했거나 집에서만 있을 것 같은 신체를 가진 노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특히, 한국의 병원에서 근무했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혼자 오셨지?'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조금은 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캐나다가 여유롭고 모든 것이 천천히 할 수 있는 나라라 가능한 부분인 것 같기도 하다.


한국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며 한국의 노인들과 비교적 가까이하며 살아왔던 나는 위와 같이 다른 문화를 느끼고 신기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같은 사람 사는 곳이다라는 생각이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문화가 더 낫고 좋음은 없다. 그저 문화가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살아가는 건 같았다.

노인들도 취미생활을 즐기고 마시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걸 즐긴다. 한국에서나, 캐나다에서나 나처럼 어린 봉사자들을 보면 따뜻하게 웃으며 환영해 주신다. 우리와 이야기하는 것도 즐거워하신다. 그리고 각자 좋아하는 음식이 있었고, 누구는 커피를 또 다른 누구는 차를 마신다.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음악에 집중하고, 추억이 담긴 노래, 사연이 있는 노래엔 슬픔을 느낀다.


나는 시니어센터 봉사를 하며 당연한 사실이지만 나에겐 큰 깨달음을 얻었다. 특별한 무엇인가 있을 것 같았던 이곳엔, 특별함은 없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지금 내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제일 특별하고 소중했다.

현재, 내가 꿈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는 그 사실이 가장 특별했다.


어쩌면, 내가 가지고 있던 건 '해외'라는 것 자체에 대한 환상이라기보다 내가 나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환상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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