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 온 지 3주 차쯤 됐을 때, 나는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일에서 온 친구 'Chiara'를 만날 수 있었다. Chiara는 모국어는 독일어였지만 시니어센터에 오시는 분들이 "너의 영어는 완벽해"라고 극찬할 만큼 영어를 편하게 구사할 수 있는 친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친구는 6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대단한 언어능력자였다.)
봉사 간 첫날, Chiara 에겐 이곳에서의 마지막 남은 주였고 금요일까지 봉사를 하러 온다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금요일에 이 친구를 한번 더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더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금요일 약 한 달간 거의 직원처럼 매일 함께 했던 Chiara와 이별을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날, Chiara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봉사를 왔지만 나는 Chiara와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대신 멕시코 친구 Daniel과 함께 팝콘을 만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예정되어 있던 시간이 훌쩍 넘기고 Daniel 은 나에게 오늘 Chiara와 마지막이기에 카페에 가기로 했는데 나보고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당연히 좋다고 했고, 그는 그곳에 다른 친구도 올 건데 너도 분명 좋아할 거라며 이야기해 주었다.
카페엔 일본 친구 Rena 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Chiara, Daniel, Rena와 다 같이 이야기를 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Rena는 떠나는 Chiara를 위해 본인 마음을 담은 엽서 한 장을 써왔다. 그곳엔 Daniel 도 나도 한 마디씩 떠나는 Chiara를 향해 아쉬운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게 나와 Rena , 그리고 Daniel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나와 Rena, Daniel 은 가벼운 하이킹을 떠날 수 있었다. 처음 셋이서 Deep cove로 하이킹을 떠난 날이다.
나는 내가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하이킹을 떠나는 게 처음이라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내가 이들에게 영어를 못해 피해주진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하이킹. 멕시코, 일본, 대한민국. 서로 다른 언어가 모국어인 세 사람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새로웠을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이곳에 오기 전에는 어떤 일을 했는지, 무슨 전공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정말 익숙한 대답들이 들려왔다.
Deep cove 풍경
Daniel 은 메카트로닉스 전공이었다. 나의 최측근에 메카트로닉스 전공을 한 지인이 있다. 그래서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Rena의 대답을 듣는데 내가 평소하고 다니는 답을 그녀에게서 들려올 때, 잘못 들었나? 싶었다.
내가 해야 할 대답을 왜 Rena 가 하고 있지? 이곳에 온 지는 얼마 안 됐지만, physiotherapist를 만난 적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직장동료, 교육이 아니면 물리치료사는 만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일본에서 물리치료사였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도 나와 똑같이 5년간 일을 했다고 했다. 나는 너무 놀라, 나도 5년간 일을 했고 물리치료사였다고 이야기했다. Rena도 놀란 눈치였다. 서로 몇 번을 되물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디서 일을 했는지, 주로 어떤 사람들을 치료했는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은 Daniel 도 함께 있었기에 '물리치료'를 주제로 오래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날 나는 Rena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기회만 보고 있었다. 나는 이 시기 일을 하고 있지 않아 여유로웠지만 Rena는 일을 하고 있어 매우 바쁜 상태였다.
셋이 먹었던 허니도넛 :)
한 달 후쯤이었을까 Daniel도 멕시코로 돌아갔다. 나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Rena는 본인의 비자기간은 조금 더 남아있지만 2개월 정도 앞당겨 빨리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밴쿠버의 물가가 너무 비싸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가기 전, 우리는 Banff에 함께 여행 갈 것을 약속했다. Banff 여행 계획은 나의 스케줄로 인해 무산이 되었지만 우리는 함께 Victoria로 갈 수 있었다.
훼리티켓! 둘이 입은 옷이 비슷해 신기했다 :)
둘이 떠났던 Vancouver Island, Victoria 로 여행. 여기서 나는 Rena와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일본에서의 물리치료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서로의 고민,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부분들, 여기서 경험한 부분들 등 정말 많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Rena는 같은 물리치료사고, 경력도 나와 비슷하게 5년 일을 했으며 나이도 나와 비슷했다. 나보다 1살 많은 언니였다. 사실 한국을 벗어나면 언니, 오빠 라기 보단 이름으로 부르고 다 친구지만 말이다. 모든 상황이 나와 비슷했고, 나보다 약 1년을 먼저 와서 경험했던 Rena였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경험하고 싶은 부분들을 Rena에게 알렸다. 그리고 내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했다. 그녀도 나와 다르진 않았다.
Rena 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고, 그녀는 나보다 먼저 시도를 하고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공통점. 두 나라는 물리치료사 단독개업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캐나다는 단독개업이 가능한 나라. 나는 이곳에 제일 처음 왔을 때 근처 클리닉에 메일을 다 보냈지만 퇴짜 맞았다. Rena 또한 모든 클리닉과 센터, 병원에 메일과 전화를 돌렸다고 했지만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곳에서의 재활을 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Care giver로 일하는 것이었다. 밴쿠버에서 있다 보면 한국의 커뮤니티도 굉장히 잘 되어 있지만 아무래도 일본과 중국의 커뮤니티가 정말 크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일본에이전씨를 통해 일을 구했다고 했고, 일본 에이전씨지만 본인이 가는 곳은 캐네디언이기에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했다. 또한, 내가 원한다면 본인 에이전씨에 이야기해 내가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Care giver로 일하는 것 외에도 식당에서 Server assist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도 나처럼 현지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일본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한 적도 있었는데 특유의 일본문화와 그 분위기에 여기서 뭐 하고 있지? 이건 원하던 것이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어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Rena와 내가 만난 곳은 어찌 보면 South Granville senior centre. 서로 봉사를 간 시기는 다르지만 둘 다 이곳에서 봉사를 했기에 만날 수 있었다. 둘 다 병원에서 뇌졸중, 척수손상, 외상성뇌손상 등 환자분들의 재활을 돕는 일을 했었다. 일본과 한국의 시스템이 다르기에 일하는 환경에서 조금 차이 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많은 날을 10시, 11시 늦게 퇴근했다고 한다. 이유는 가정방문치료(Home Nursing care system) 때문이었다. 이를 다녀와 프로그레스 작성까지 마치고 나면 항상 10시 넘어 퇴근하곤 했다고 한다. 한국의 물리치료사. 즉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기사의 장점은 칼퇴근인데 이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Rena는 나처럼 미래 하고 싶은 게 많지만 방향성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친구였다. 나 또한 지금 찾아가는 과정인 것처럼. 그 계획 중 하나는 호주의 물리치료사에 대해 고민도 하고 있었다. 원래 Rena는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호주 워킹홀리데이 문이 닫혔고 대신 캐나다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려고 했던 이유도 호주 물리치료사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학교공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호주에서 물리치료사를 하기 위해선 학교를 다시 나와야 했기에 고민되는 부분이 아닐 수가 없다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뉴질랜드에 대해 잠시 알아본 적이 있었다. 뉴질랜드는 몇 가지 조건만 충족한다면 물리치료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외국인이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물리치료사로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뉴질랜드의 면허가 호주에서도 인정을 해주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나는 이 과정이 있다고 알려주었고 Rena 도 고민해 본다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주제의 내용의 대화를 정말 오래 이어나갔다. 나는 Rena 와의 시간이 짧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관심사도 비슷했고, 나이도 비슷했고, 직업도 같았고 티키타카도 잘 맞았던 Rena이다.
Rena 가 떠나기 전, 우리는 한번 더 만나 식사를 함께 했다.
나는 이제 시작이고 Rena는 마무리를 짓고 떠난다. 그리고 Rena와 나는 물리치료사의 삶, 그리고 그 삶의 벗어나 워킹홀리데이에 온 우리, 그리고 지금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퇴사, 그리고 이곳에서의 워홀러의 삶.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 경험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순 없다는 걸. 그리고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엔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는 걸. 과거의 내가 본다면 지금의 나를 부러워했을 것이고 지금의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그래서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서로가 어떤 삶을 살아갈진 모르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은 앞으로 삶을 살아가며 평생을 기억하고 또새로운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하지 못 했을 경험들. 이 경험들은 물리치료사로서 일도 가치 있고 행복한 삶이었지만 그 삶을 넘어 나에게 더 큰 가치를 가져다줄 부분이라는 걸.
Rena는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우리는 종종 연락한다. 그리고 둘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Rena와 여행을 떠나던 때와 지금의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그 부분을 Rena에게 이야기했다. Rena는 나에게 말했다.
"What makes you think that? I will support you whatever you do though"
짧았지만 짧았던 만큼 더 귀중했던 Rena 와의 시간. 이 시간은 내가 이곳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 더 튼튼한 기반과 다채로움을 전해주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내가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의 것들을 경험하고 채워가는 캐나다에서의 일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