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가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 항상 기다려지는 영화제가 있다. 바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다. 제16회를 맞이한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지난 26일 개막하여 10월 2일까지 고양시 일대에서 43개국 140편의 최신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부쩍 바람이 선선해져서 마음이 들뜨는 가을날, '우정과 연대를 위한 행동'이 슬로건인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방문했다.
비(非)극장 상영 프로그램
레이킨스몰에 들어서면 보이는 비극장 상영 프로그램의 풍경
‘세계의 상태로서의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번 비 극장 상영 프로그램에서는 총 9편의 영화를 극장 밖 일상의 풍경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쇼핑몰 안에 설치된 가벽 속에서, 쇼윈도가 늘어선 상점가의 어느 갤러리 안으로, 바람이 부는 옥상 위의 가벽 속에서 영화가 상영된다. 쇼핑몰의 일상에 스며들듯이 설치된, 관람객을 둘러싼 공간과 멀리 떨어진 낯선 곳의 풍경을 담은 영화들이다.
<새로운 폐허들> 전시 풍경
영화제 방문 첫날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마주한 <새로운 폐허들>을 무언가를 설치 중이거나 준비 중인 현장인 줄 알고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쇼핑몰에서 으레 쉽게 마주하는 풍경이라고 지레짐작했던 탓이었다. 전시 안내도를 따라 다시 도착한 그곳에는 작품에 영감을 줬던 6편의 시와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헤드폰이 있었다. 2070년을 배경으로 관람객에게 요가를 가르쳐주는 <기지개>의 상영 장소에는 황금색 의상과 요가 매트 2개가 펼쳐져 있었다.
2층과 3층에서 진행 중인 비극장 프로그램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5층 옥상에서 상영 중인 두 편을 여유롭게 관람했다. 평일 이른 낮의 여유를 누리며 <광합성 하는 죽음>을 관람할 수 있었다.
<광합성 하는 죽음> 비극장 상영 풍경
비 극장 상영 프로그램에서 관람한 작품 한 편과 극장 상영으로 관람한 작품 2편을 간단히 소개해 보려 한다.
<광합성 하는 죽음> Photosynthesizing Dead in Warehouse
이것에서 저것을 보기, 또는 저것에서 이것을 보기는 서로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의 연결을 불러온다. 다른 곳에 있는 이와 시간차를 두고 대화하는 서간문은 시신이 부패하는 9가지 단계를 그린 구상도를 실물로 볼 수 있을지 문의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점점 썩어 들어가면서 곰팡이가 피고 형상이 바뀌는 유리관 속 과일 채소를 여러 인물이 지켜본다. 구상도를 보며 명상하고 죽음을 떠올리는 승려들과 같다.
서간문에서 언급된 코로나와 A형 간염에 걸려 균에 감염된 신체 역시 곰팡이(균)에 서서히 잠식당하며 부패해 가는 채소 과일들과 연결을 만들어낸다.
편지의 발신자가 물류창고에서 일하면서 예술을 떠올리고, 예술을 떠올리면서 물류창고를 떠올린다는 말은 작품을 관통한다. 서로 다른 것 사이의 연결점을 발견하는 일은, 그 연결점 사이의 공백을 연결자가 메우는 일은 창작의 원리를 연상시킨다.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서로의 유령처럼 언급되지 않을 때도 존재감을 비추는 여러 구성 요소가 유기적으로 느껴졌다. 죽음을 구심점으로 구상도와 부패하는 과일 채소, 균에 잠식당하는 신체 그리고 영화의 여러 요소가 꼬리를 문 뱀처럼 계속해서 돌고 돈다.
<그랜드 테프트 오토의 햄릿> Grand Theft Hamlet
팬데믹으로 공연이 취소되고 단절을 경험하는 시기, 게임 그랜드 테프트 오토 안에서 연극 햄릿을 올리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서로를 죽이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오픈 월드 게임 속에서 시작된 연극 올리기는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다.
햄릿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인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는 낯선 플레이어로부터 끊임없이 죽임을 당하는 세계관에서 새로운 맥락을 가진다. 일단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다음 대사를 외칠 수 있는 세계에서, 게임 바깥 현실의 일들 때문에 함께 하기로 한 연극 크루들이 그만두거나 사라지는 세계에서 햄릿의 대사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사느냐 죽느냐, 존재하느냐 마느냐, 접속하느냐 마느냐, (연극을) 하느냐 마느냐.
오히려 게임 속이라서 더 자유롭고 좋은 점도 있다. 예산이 10억인 햄릿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말처럼 게임 속이라 현실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연출을 할 수 있다. 장엄하게 몰아치는 파도를 배경으로, 호화 요트를 배경으로, 하늘을 나는 중인 비행선의 꼭대기를 배경으로 다양하게 장소를 옮겨 다니며 햄릿을 연기한다.
다큐멘터리 속 인물들은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자신의 모습으로 꾸민 캐릭터들과 본인의 목소리로 서로를 만난다. 연극의 등장인물들은 아름다운 그래픽과 살인, 죽음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파격적인 옷을 입은 캐릭터들의 모습으로 고전인 햄릿의 대사를 말한다.
<즐거운 나의 집> Home Sweet Home
어린 두 소년이 뛰어노는 평화로워 보이는 홈비디오로 시작하는 <즐거운 나의 집>은 폭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 가정 폭력에 대해 말한다.
홈비디오와 사진, 서신들, 서류들, 그리고 할머니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오래된 홈비디오 영상을 잠시 멈추거나 느리게 반복해서 보여준다.
영상 속의 할아버지는 가정 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보면 호감을 주기 쉬운 활짝 웃는 인상이다. 할아버지가 폭력을 저지르기 전에 항상 갑자기 얼굴이 굳었었고, 그 순간을 항상 알아차렸다는 할머니의 말은 주변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폭력의 피해자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당신 없이는 못 산다고 말하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폭행하고, 다음 날에 초콜릿과 꽃다발을 안겨주었다는 구술이 이어진다.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한 여성이 이혼을 결심하고 실행하기까지의 과정은 '즐거운 나의 집'의 풍경과 전혀 다른 실상을 알리는 구술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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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DMZ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관람하며 말하지 않거나 만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강력한 동력을 느꼈다. 허구와 현실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흥미로운 작품들과 새로운 시도가 담긴 작품들을 보며 다큐멘터리의 범위와 의미, 무엇이 다큐멘터리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것일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좋아하는 것을 더 잘 좋아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겠구나, 하면서 '좋았다'라는 감상 이외에 다른 말을 궁리했다. 욕심내어 여러 작품을 단시간 동안 관람하면서 소화하는 어렵고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다큐멘터리는 ‘현실 세계의 창의적 재구성’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 세계의 풍경과 이미지를 재료로, 소리를 어떤 방식으로 엮어서 보여줄지 치열한 고민의 연속이었던 결과물들을 관람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창작자들의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에서 만난 다큐멘터리의 세계는 넓고도 깊었다.
영화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폐막식이 있는 2일까지 남아있는 기간 동안 보고 싶고 궁금한 작품들을 온라인 상영으로도 볼 예정이다. 거리나 일정 때문에 영화제 현장에 가지 못한다면 온라인 상영을 보는 것도 방법이다.
매번 영화제 기간마다 왜 몸이 하나일까, 해리포터에 나오는 헤르미온느의 시계가 있었으면 좋겠다 한탄한다. 매번 어떤 새로운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나게 될까,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까, 기대감으로 가득 찬 마음을 안고 영화제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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