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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Nov 22. 2021

나는 아픈 사랑을 한다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바람이 사늘한 아침이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차가운 날이었다. 아내는 아침을 거른다고 해 늘 가던 식당을 혼자 갔다. 자율 배식을 하는 `기사님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내와 늘 함께 앉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하얀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쌀밥, 돼지고기 조림, 배추 겉절이, 무생채, 상추 무침, 가지 조림. 반찬을 더할수록 흰 접시는 물감을 짜 놓은 팔레트처럼 섞이고 있었다. 음식이 담긴 접시와 된장국을 테이블 위에 놓고 수저를 가지러 갔을 때였다. 나는 조금 전 내가 갖다 놓은 음식에서 피어나는 따스운 김을 보고 흠칫 놀랐다. 짧은 순간에 몽글몽글 피어오른 김은 햇빛을 받아 살짝 모습을 드러내다 사라졌다. 나에게 주어진 따뜻한 음식을 가슴 앞으로 끌어당기고 비어있는 앞자리를 바라봤다. 평소 같으면 아내가 앉아있을 자리는 비어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자리에 햇볕을 데려와 겸상을 하면서 아침을 먹었다. 


 숲에는 키 큰 소나무가 있었다. 그 소나무는 유난히 곧고 크게 자랐다. 당연히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 소나무와 약간의 틈을 두고 갈참나무가 바짝 붙어있었다. 갈참나무 역시 소나무처럼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이 두 나무 주위로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색으로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찬바람이 불면서 은행나무와 갈참나무, 밤나무 등은 하루하루 색을 달리하면서 숲을 변화시켰다. 여름 내내 숲을 시끄럽게 하던 그 많은 새들도 어디로 갔는지 조금은 조용해진 것 같다. 나는 숲을 보면서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곳까지 차를 몰고 오는 동안 눈물이 났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났고 주차장에 도착해서는 20대의 문학청년처럼 울었다. 그것이 `따순 김`때문이었는지 그동안 생활에 쫓기어 읽지 못한 책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성취감을 맛보고 뿌듯하게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다. 별다른 불만도 없었고 정서적으로 물질적으로 불안한 시기는 넘겨서 평안하지만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글쓰기`와 `글읽기`에 대한 갈증은 여전했고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책을 못 읽고 퇴근하면 어떤 단어를 떠올리며 연상을 하거나 시구를 외우면서 어둠을 헤쳐 집으로 갔다.  

 작가는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스스로와 맞닥뜨리고 묻고 답해야 한다. 오랜 시간으로 굳어버린 감성을 두들겨 단어의 물을 붓고 어휘로 반죽하고 부드럽고 탄성 있는 면발 같은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때로 돌처럼 단단한 것에, 벽처럼 막힌 것이 질문해도 대답은 내가 해야 한다. 시각에 대해, 관점에 대해 되짚어보고 `낯선 사유`를 `익숙한 것과 결별`을 해야 한다. 


 무엇이 나의 감성과 감수성을 건든 것일까. 아주 미새한 자극에도 떨리는 거미줄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를 보곤 하지만 이 처럼 극단적이진 않았다. 외로움을 견디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혼밥을 먹어도 위축되지 않았다. 누선을 건드린 것은 어쩌면 문학에 대한 동경 인지도 모른다. 갈 수 없는 문학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그곳에 대한 그리움과 좌절이 한 번에 몰려와 나를 엄습하는 순간에 `따순 김`을 보았고 몽글몽글 피어오른 김이 감정의 현을 건드렸던 것 같다. 울고 난 후에 나는 생기를 찾았고 숲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보면서 어떤 결심을 했던 것 같다.

 아직,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가을과 겨울의 틈에서 내가 가야 할 아득한 길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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