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필터>를 읽고나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SNS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트위터, 위챗, 라인, 스냅챗, 페이스북, 틱톡 등 수많은 서비스가 존재하지만, 저는 자신 있게 '인스타그램(Instagram)'을 뽑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서비스도 인스타그램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의 인지도와 이용자 수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은 인스타그램이 성장하기 이전부터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가장 먼저 10억 명의 이용자 수를 달성했습니다. 틱톡도 2021년에 10억 명의 사용자를 기록하며, 대세 소셜 미디어로 자리매김하고 있죠.
그러나 인스타그램은 단순히 서비스 규모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인스타그램이 등장한 이후,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기 위해 식사 전에 음식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음식의 맛보다 플레이팅이나 식당의 인테리어를 중요시하기도 하죠. 여행을 하면서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할만한 관광지와 숙소를 찾고,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방이나 작업실을 인스타그램스럽게 꾸미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스타그램은 어떻게 문화를 선도하는 서비스가 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은 인스타그램이 어떻게 시작되어 메타(구 페이스북)에 인수되었고, 어떤 방법으로 꾸준히 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인스타그램을 창업한 케빈 시스트롬(Kevin Systrom)은 1983년에 태어나 보스턴 교외에서 자랐지만, 2003년에 스탠퍼드 대학교에 진학하며 실리콘밸리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대용량 사진을 사람들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서비스인 포토박스(Photobox)를 만들었고, 주로 대학교 동아리 활동에 서비스를 활용했습니다.
그러던 2005년 어느 날, 시스트롬은 스탠퍼드 친구들을 통해 동네 스타트업 창업자 한 명을 만났습니다.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창업자는 당시 스탠퍼드 컴퓨터공학과 건물 앞에서 포스터를 들고 동아리 회원을 모집하듯 프로그래머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인재 확보가 절실했던 그에게 사진 공유 서비스를 만든 시스트롬은 좋은 인재였고, 창업자는 시스트롬이 팀에 합류하여 사진을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추가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창업자는 바로 마크 저커버그였고, 페이스북은 이제 막 떠오르는 신생 기업 중 하나였죠.
시스트롬은 당시 수업의 교수님에게 이 같은 제안을 이야기하며 고민을 상담했지만, 그녀는 시스트롬이 다른 누군가의 비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자신의 잠재력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충고했습니다. 페이스북 같은 것은 잠시 지나가는 유행이며 별 볼 일이 없다고 말이죠. 그렇게 시스트롬은 저커버그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달하고, 우선 학교 생활에 충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시스트롬은 교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창업 인턴 과정을 밟아야 했습니다. 마침 인터넷 팟캐스트 시장을 구축하고 있던 오데오(Odeo)라는 회사에 관심이 있던 시스트롬은 CEO인 에번 윌리엄스(Evan Williams)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에번은 이미 블로그 사이트 블로거(Blogger)를 구글에 팔아 유명해진 사람이었죠. 그렇게 시스트롬은 인턴직을 얻어서 샌프란시스코에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인턴 생활을 하던 시스트롬은 오데오에 막 채용된 엔지니어 한 명과 같이 일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잭 도시(Jack Dorsey)인데요. 그는 뉴욕대를 중퇴한 29살로, 문신과 코 피어싱을 하고 스스로를 예술가라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시와 시스트롬은 독특한 음악 취향이나 고급 커피를 즐긴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둘 다 사진을 좋아했습니다. 실리콘밸리에는 그런 관심사를 가진 엔지니어가 많지 않아서 그들은 금방 친해지게 되었죠.
그러던 2005년 10월, 페이스북은 사진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용자는 5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시스트롬은 뒤늦게 페이스북의 전망을 잘못 판단했다는 것을 깨닫고 제품 운영 담당 직원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이메일에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졸업할 시점이 된 시스트롬은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한 곳은 당시 1만 명에 가까운 직원이 근무하는 구글(Google)이었고, 한 곳은 오데오에서 새로 출시한 트위터라는 팀이었죠. 인턴 할 때 친해진 잭 도시가 트위터의 CEO였고, 시스트롬은 전 동료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그 사이트를 자주 이용하고는 했었습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시스트롬은 다른 스탠퍼드 대학교 친구들처럼 구글이라는 안정적인 루트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시스트롬이 경험한 구글은 학구적인 스탠퍼드 출신들이 주도하여 데이터를 기반으로 일을 처리하는 회사였습니다. 그곳에서 회사의 프로세스와 업무 방식을 배울 수 있었지만, 구글은 컴퓨터 공학 학위가 없던 시스트롬에게 제품 만드는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스트롬은 인수합병을 담당하는 팀으로 옮겨갔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구글이 아무 회사도 사들이지 않자, 시스트롬은 회사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2009년에 여행 정보 공유 사이트를 만드는 넥스트스톱(Nextstop)이라는 작은 스타트업에서 제품 관리자 자리를 맡게 되었죠.
당시 많은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차세대 기술의 골드러시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시스트롬도 업무 시간 외에는 모바일 앱 기술을 익히는데 몰두하였습니다. 그리고 2009년 말, 시스트롬은 그가 자주 마시는 켄터키 위스키의 이름을 따서 버븐(Burbn)이라는 모바일 앱을 만들었습니다. 버븐은 위치 기반 서비스로 특정 장소, 계획, 사진 등을 친구와 공유하는 SNS였습니다.
2010년 1월, 버븐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로 결심한 시스트롬은 넥스트스톱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스타트업 파티에 가서 초기 투자 전문 회사 베이스라인 벤쳐스(Baseline Ventures)를 운영하는 스티브 앤더슨(Steve Anderson)을 만나는데요. 그는 스탠포트와 구글 출신에 자신감이 넘치는 시스트롬에게 아직 투자자가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들은 2주에 한 번씩 만나서 버븐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대화 과정에서 엔더슨은 투자 조건으로 공동 창업자를 구할 것을 제안했고, 시스트롬은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공동 창업자의 몫으로 10%의 지분을 떼어놓겠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시스트롬의 앱 개발을 도왔던 단짝 하치무스도 공동 창업자로서 역량은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글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고, 대신 마이크 크리거(Mike Krieger)를 추천했습니다. 크리거는 스탠퍼드 출신으로 시스트롬보다 두 학년 아래였는데요. 시스트롬은 크리거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크리거는 성격이 좋고 판단이 냉철했으며, 웃는 얼굴에 엔지니어로서도 시스트롬보다 경험이 훨씬 많았습니다. 크리거는 당시 인스턴트 메신저 서비스를 운영하는 중견 기업 미보(Meebo)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졸업한 뒤에 더 작고 도전적인 회사에서 일하다, 몇 해 뒤에 직접 회사를 차리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크리거에게 공동 설립자는 매력적인 제안이었죠.
이후 시스트롬은 투자자를 늘리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넷스케이프 공동 창업자로 실리콘밸리에서 인기 높은 벤처 캐피털 회사 앤드리슨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를 운영하는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에게 25만 달러를 투자받게 됩니다. 베이스라인 벤쳐스의 앤더슨도 이 소식을 듣고 같은 수준의 지분을 위해 25만 달러를 투자하게 되죠. 트위터의 CEO에서 물러나서 스퀘어를 창업한 잭 도시도 25,000 달러의 투자를 집행했습니다.
투자를 받은 시스트롬과 크리거는 버븐을 운영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공동 사무실에 근무하며, 행사 이후 남은 음식을 가져가거나 인근 식품점에서 특가로 파는 3.40 달러 샌드위치로 식사를 해결하였죠.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버븐의 미래에 회의감이 생긴 시스트롬은 크리거와 이야기 끝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트위터를 만든 오데오처럼 아이템 전환(피벗)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들은 버븐의 강점 세 가지를 정리하고, 그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사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대해 풀어야 할 세 가지 문제점에 대해 브레인스토밍 하였는데요. 그들이 생각한 문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 3G 핸드폰 네트워크에 이미지를 로딩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2. 사람들은 화질이 떨어지는 스냅사진을 공유하기 꺼려한다.
3. 사진을 올릴 서비스가 많다는 것이 번거롭다.
시스트롬과 크리거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사진은 가급적 픽셀을 적게 사용하여 빠르게 로딩할 수 있도록 만들고, 140자 제한을 둔 트위터처럼 제약을 느끼도록 사진은 모두 정사각형으로 제한했죠. 또한 트위터처럼 앱의 상단에 팔로워와 팔로잉을 띄우고, 페이스북의 엄지와 비슷하게 하트 모양의 좋아요 기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출시 전, 시스트롬은 아내가 될 여자 친구와 짧은 휴가를 떠났습니다. 당시 여자 친구는 시스트롬이 찍은 사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는데, 시스트롬은 자신이 필터 앱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변명하게 되죠. 실제로 당시 스마트폰은 화질이 선명하지 않아서 필터 앱이 인기였는데, 이때 시스트롬은 서비스에 필터 기능을 넣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몇 가지 필터 기능이 추가되었고, 시스트롬과 크리거는 마지막으로 서비스의 이름을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발음과 철자가 쉬우면서 속도감이 담긴 이름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인스턴트(instant)와 텔레그램(telegram)을 합성한 '인스타그램(Instagram)'이 세상에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인스타그램은 최초 사용자들을 신중하게 선정했습니다. 특히 사진을 잘 찍을 만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요. 트위터 팔로우 수가 많은 디자이너가 주요 타깃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사용자들은 예술적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줬고, 누가 봐도 멋진 콘텐츠를 만들어냈습니다. 인플루언서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 최초의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죠.
그리고 잭 도시는 최고의 마케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160만 트위터 팔로워에게 인스타그램을 소개했고, 2010년 10월 6일, 인스타그램은 출시되자마자 도시 같은 사람들이 공유한 덕분에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첫날 인스타그램을 사용한 사람은 2만 5천 명이었습니다. 한 주가 지나가 이용자는 1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몇 달이 지나기도 전에 이용자는 200만 명까지 빠르게 증가했죠.
무엇보다 인스타그램은 복잡하지 않아서 유행을 탈 수 있었습니다. 과거 저커버그는 마이스페이스의 요란함에 거부감을 느껴 깔끔한 디자인의 페이스북을 만들었는데, 인스타그램이 출시됐을 무렵의 페이스북은 너무 많은 기능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뉴스피드와 이벤트, 그룹 등 수많은 기능이 있었고, 사진을 올리기도 번거로웠습니다. 인스타그램이 바로 그 지점을 비집고 들어간 것이죠.
인스타그램은 명백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시스트롬과 크리거는 여전히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시장에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많았고, 나날이 늘어가는 유저로 인해 서버는 항상 문제를 일으켰죠. 사용자가 늘어나서 문의와 오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인스타그램은 처음으로 커뮤니티 관리자와 엔지니어를 고용하고, 새 사무실을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700만 달러의 시리즈 A 투자를 받을 때까지도, 직원은 여전히 네 명이 전부였습니다.
인스타그램이 점점 일부 예술인들만의 영역에서 벗어나 주류의 흐름으로 들어서자, 기업들도 계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펩시(Pepsi)와 스타벅스(Starbucks)가 계정을 만들고, 래퍼 스눕 독(Snoup Dogg)이 셀럽으로는 최초로 인스타그램에 가입했습니다. 특히 1,100만 명의 트위터 팔로워를 가진 저스틴 비버가 인스타그램에 가입했을 때에는 서버 트래픽이 폭주하기도 했죠. 그리고 비버의 팔로잉은 인스타그램 커뮤니티의 성격까지 바꿔놓았습니다. 사소한 일상의 흥미로운 순간을 이야기로 전달하려는 진지한 사람들이 주축이었던 곳이 팝 문화로 진화한 것입니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합세하면서 그들은 좋아요를 받기 위해 좋아요를 누르고, 팔로우를 받기 위해 팔로우를 누르는 등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창업한 지 약 18개월이 되던 2011년 4월, 인스타그램은 2,500만 명의 이용자 수를 달성합니다. 그리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부터 인수 제안을 받게 되는데요. 시스트롬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트위터의 공격적인 제안을 성의 없이 거절했습니다. 저커버그는 시스트롬이 '인스타그램 외의 다른 서비스를 운영하고 싶지 않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트위터와 달리 인스타그램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말하며 인수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페이스북 가치의 1%에 해당하는 10억 달러를 제안했는데, 이는 수익을 내지 않고 있는 앱 서비스에 대해 전례 없는 가치평가였습니다. 그렇게 시스트롬과 크리거는 제안을 승낙하고,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현 메타)의 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인수가 완료되어도, 인스타그램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립성을 보장받았지만, 그만큼 메타의 지원도 받지 못한 것인데요. 인스타그램은 여전히 직원이 적었고, 에러도 자주 발생했는데, 메타는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지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인스타그램은 꿋꿋이 성장을 이어나갔습니다. 메타의 커뮤니티 관리 리소스를 빌려서 퀄리티 높은 인스타그램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스냅챗 같은 경쟁자가 나타나도 스토리 기능을 도입하며 추격을 따돌렸습니다. 그러다 일정 수준 이상 유저 수가 증가하자, 메타는 인스타그램의 수익 창출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은 광고 기능을 도입했는데, 한동안은 퀄리티 유지를 위해서 광고주를 선별해서 받고 일일이 검수를 진행했습니다.
그렇게 인스타그램의 유저 수와 수익 모두 빠르게 증가했지만, 저커버그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페이스북의 성장을 잠식하는지 조사하고, 메타의 지원을 축소하며 인스타그램을 견제하였죠. 실제로 계속된 인스타그램의 인력 충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메타는 인스타그램의 지원을 늘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2018년, 인스타그램이 10억 명의 유저를 달성할 때 시스트롬과 크리거는 동반 사퇴를 발표합니다.
이후 인스타그램은 '페이스북의 인스타그램'(Instagram from Facebook, 현재는 메타의 인스타그램)으로 바뀌었습니다. 쇼핑, 릴스 등의 다양한 기능이 새로 추가되며, 현재도 성장하기 위해 노력을 거듭하고 있죠.
저는 인스타그램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선 실리콘밸리 생태계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요. 시스트롬은 마크 저커버그의 입사 제의를 거절하고, 오데오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잭 도시와 친해졌습니다. 졸업 후에는 구글에서 일하다가 투자를 받고 창업을 했죠. 시스트롬은 25살이 된 시점에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을 직간접적으로 모두 경험한 것입니다. 이처럼 실리콘밸리에는 이미 2010년에 좋은 인재와 활발한 투자, 새로운 시도와 기회가 모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의 창업과 투자도 활발해지고 있지만, 아직 실리콘밸리에 비하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과 저커버그 간의 신경전 역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이전까지 하나의 기업으로서 두 서비스의 성장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협력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이죠. 물론 제가 참고한 책 <노 필터>는 보다 인스타그램의 시각에서 작성되어, 저커버그가 정말 인스타그램이 페이스북보다 잘 되는 것을 싫어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의도가 어떠했든, 저커버그가 이끌고 있는 메타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명실상부한 글로벌 최대 소셜 서비스 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인스타그램의 성장을 이끈 시스트롬과 메타를 이끈 저커버그 모두 대단한 기업가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이 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메타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가 되는데요. 저도 인스타그램 못지않게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서비스를 만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겠습니다.
- 출처: 노 필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