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도끼다>를 읽고나서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책은 도끼다>의 작가 박웅현은 자신이 읽었던 책들이 도끼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얼어붙은 감성을 깨뜨리고 잠자던 세포를 깨우는 도끼, 머릿속에 선명한 흔적의 자국을 남기는 도끼,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새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도끼라는 것이죠.
그리고 저에게 박웅현 작가의 <책은 도끼다>는, 마치 도끼 사용 설명서와도 같았습니다. 책이라는 도끼에 대해 잘 모르는 입문자를 위해 사용법을 알려주는 기초 수업의 느낌이랄까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원래 인문학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책을 읽고 나서도 제대로 된 도끼 사용법을 깨달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죠. 다만 도끼를 휘둘러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들었는데요. 오늘은 <책은 도끼다>라는 책이 제 생각에 남긴 작은 균열에 대해 공유해볼까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그동안 인문학 도서를 별로 읽지 않았습니다.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생생한 경험이 좋았고, 인문학보다는 실제 연구나 경험을 다룬 책을 선호했습니다. 대학교 전공도 경영학이었고, 실제 사례를 탐구하고 계산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부전공마저도 인문학이랑 거리가 먼 경제학, 컴퓨터과학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소설이나 시를 비롯한 인문학은, 노래를 듣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것과 같은 여가생활로 느껴졌습니다. 이왕 노는 거면 소설이나 시보다는 넷플릭스가 낫다는 생각이었죠. 저에게 글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었고, 짧은 글을 읽을 때면 뉴스레터나 신문 기사를 읽고, 긴 글을 읽을 때에는 경제/경영 서적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지식만으로는 사람의 성장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지식만큼 중요한 것이 창의성입니다. 그리고 기술이 발달하며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반면, 창의성을 얻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지식은 최대한의 노력을 통해 얻고 싶었고, 창의성은 자연스럽게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책은 도끼다>를 읽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창의성이나 새로운 배움을 위해서 지식 못지않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동안 저도 모르게 지식을 목적으로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지식은 수단일 뿐, 실제로 제가 추구하는 것은 배움과 성장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동안 저에게 가장 큰 배움을 준 것은 기술이나 지식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우와...!' 하는 느낌을 받은 순간은 대부분 색다른 관점과 시각 덕분이었습니다. 새로운 관점을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한데, 그러고 보니 제가 그동안 여러 울림을 놓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에서는 여러 작품을 소개하며 인문학을 통해 바라본 자연, 행복, 사랑, 삶 등에 대해 다룹니다. 제가 생각한 책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견문(見聞)'인데요. 박웅현 작가도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을 언급하며, 단순히 흘러가며 보고 듣지 말고(시청), 깊이 보고 깊이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견문).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 이철수 <가을 사과>
예를 들어 박웅현 작가는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을 보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색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합니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흘러가며 보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본다는 것이죠. 이어서 작가는 '사과가 떨어진 것을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기어이 과학적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것'은 서양의 장점이며, '때가 되어 떨어지는 걸 왜 안달복달 난리들이야 하며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은 동양의 장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서양의 장점이 가져다준 문명적인 혜택도 충분히 많지만, 자연재해가 증가하는 지금은 동양의 지혜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덧붙이는데요. 저는 이 역시 박웅현 작가가 작품을 지나치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보았기에 나올 수 있는 색다른 감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이 난 채 길을 가다가, 작은 풀잎들이 추위 속에서 기꺼이
바람맞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만두고 마음 풀었습니다.
- <길에서>
그는 일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연을 통해서도 삶의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같은 것을 통해서 깊이 보는 것이 곧 능력이자 지혜이고, 그런 경험이 쌓여 풍요를 만든다고 말하는데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모나리자 사진만 찍고 오는 것보다, 자신을 소름 돋게 만든 하나의 작품 앞에서 30분 동안 멍하니 서서 감탄할 수 있는 것이 풍요로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위의 예시들은 책에서 작가가 소개한 인문학의 매력이나 중요성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책에 비해 매력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예시들이 모두 삶의 교훈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아닌데요. 그래도 이제는 인문학을 통해 소소하게 '우와...!' 하고 느끼는 이런 경험들이, 제 성장과 정신적 풍요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인문학이 사람의 생각에 균열을 내서 새로운 싹을 틔우게 만드는 '도끼'라면, 과학과 기술은 실제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각을 풍요롭게 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밥도 매우 중요한데요. 몇몇 인문학 서적을 보면 밥에 대해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거나, 오히려 경시한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사농공상이라며 상업을 무시하거나, 실학보다 성리학을 우선시한 것과 같이 말이죠.
특히 책의 여러 챕터 중에서 '지중해식 문학'을 소개한 부분에서 이러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중해식 문학을 소개한 저자의 글에서, 따스한 햇살과 있는 그대로의 삶이 도시에서 노력하며 사는 삶보다 긍정적인 것으로 소개됩니다. 마치 자연을 만끽하며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도시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물론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가능하고, 이 역시 작가의 말을 제가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해석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 서적을 보면 자연과 시골은 선이고 도시와 물질은 악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실제 인간들의 삶에서는 그 둘이 공존하고 있고, 함께 발전하며 인간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기술이 인문학을 존중하고, 더 많은 인문학이 기술을 존중한다면 보다 새로운 기술과 인문학이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 덕분에 저는 인문학이라는 도끼의 소중함에 대해 알게 되었고, 새로운 울림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작가가 소개한 대부분의 문학에 대해서는 소개만큼 감탄스럽거나, 대단해 보이지 않았는데요. 이는 해당 문학에서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제 가치관과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이제 막 인문학의 매력을 느낀 입문자로서 제 도끼 사용법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박웅현 작가는 <책은 도끼다>에서 언급한 책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고 하죠. 반면 저는 소개된 책을 한 번씩 다 읽어보지도 않았는데요. 소개된 책을 한 번씩 읽어보고 <책은 도끼다>를 다시 펼쳐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때 제가 느끼는 감상은 지금과 사뭇 다르겠죠? 그때의 저는 조금은 도끼 사용법을 익히게 되었을지 궁금하네요.
비록 인문학의 중요성이다, 도끼 사용법이다 하며 그럴듯하게 감상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제가 느꼈던 감정 자체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중/고등학생 시절에 국어 교과서를 통해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부가 지겨워질 즈음에 국어 책에서 단편 소설 하나를 재미있게 읽던 그 즐거움 말이죠. 그리고 앞으로 제 삶에 약간의 공간을 만들어서 잊고 있던 즐거움에게 그 부분을 내어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