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에게서 낯선 향기가 느껴진다

누구냐, 너? 내가 알던 네가 아냐

by 김돌

도저히 내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눈에서 받아들인 정보가 현실일 리 없다며 뇌에서는 자꾸만 의심의 신호를 보내왔다.


“에쿵. 우리 애긔, 잘 자또? 얼굴이 너무 뀌요미야. 아잉. 자다 일어나쒀 엄마야 얼굴 보니까 쪼아?”


아내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본인이 마치 같은 또래라도 된 양 아기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혀 짧은 소리라니. 만난 지 12년 만에 처음이었다. 8년 간의 연애, 결혼한 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연애 초반에 아내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다른 여자애들이 가진 애교 따위 없다면서, 아니, 죽어도 그런 짓은 못하겠으니 이해해 달라고. 경상도 남자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뭔가의 착오로 인해 서울 여자로 잘못 태어난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 그녀였다. 다행히도 나 역시 그런 취향은 아니었다. 다른 남자애들이 으레 그러하듯 상대방의 애교에 가중치를 두진 않았으니, 그러니까, 다 큰 성인들이 왜 그 따위 유아 퇴행적인 행동을 하려 애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아내는 혀만 짧아진 게 아니라 몸도 앙증맞게 들썩거렸다. 아이가 까르르 웃어주니 더욱 신이 나서 JYP의 걸그룹 트와이스의 ‘샤샤샤’ 춤을 춘다. 가슴팍쯤에 두 손을 올리고서 아래위로 흔들흔들, 여전히 원래 길이로 돌아오지 않은 짤막한 혀는 “쌰아 쌰아 쌰아이-” 같은 소리를 내고 있다. 트와이스뿐이랴. 근래 유행하는 귀여운 아이돌 댄스부터 게다리춤 같은 오래된 코믹 댄스까지, 아이가 좋아라 하는 몸짓이라면 능히 하루 종일 보여주겠다는 기세로 몸을 흔든다. 이런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어서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민식이 내뱉는 그 유명한 대사를 절로 읊조리게 된다. “누구냐, 너?”


아무리 엄마가 되었다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지금 나이대 아기한테는 이렇게 해야 돼. 맹숭맹숭하게 우두커니 서 있지만 말고 너도 나 따라서 해. 이렇게 요렇게.”


공동 육아의 담당자로서, 아내는 내게도 본인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태어나서 6개월 정도까지는 아이의 인지 발달을 위해서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고 적당한 몸짓과 손짓 같은 리액션도 곁들여야 한단다. 다양한 자극을 제공하면 뇌도 그에 비례하여 발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게 다 아이를 위한 일이라는 거다. 그래서 나도 아내를 따라 꼬마 아이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평소에 내 본 적 없던 높고 가느다란 톤이었다. 금기의 비급인 <규화보전>을 익히느라 자신의 남성을 거세해버린 동방불패가 이와 비슷한 목소리였지 않을까 싶다. 기묘한 소리를 낼 뿐 아니라 열심히 춤도 췄다. 난생처음 해 보는 짓이었는데, 곁에서 지켜본 아내의 감상평에 따르면 저어기 북쪽 수령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신입 기쁨조의 몸짓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의 표정은 싸늘했다. 흡사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독설을 내뱉던 심사위원 사이먼 코웰의 표정 같다. 아무래도 엄마에 비해 아빠의 소리와 움직임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이런 까다로운 녀석 보게.


녀석이 그래도 남자랍시고 여자인 엄마를 더 좋아하는 거 아닐까. 고대 로마인들은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목소리를 꼽았다. 심지어 노래를 잘 부르는 여자를 두려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라틴어로 ‘노래를 부르다’라는 의미인 ‘carmen’이 영어의 ‘charming’, 즉 ‘매력적인’이라는 뜻의 단어가 되었다는 내용을 어디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시대를 더 거슬러 선사시대까지 올라가 보면, 남성은 오랜 기간 동안 사냥감을 쫓아다녔던 수렵 생활의 습성이 현재에도 본능처럼 남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냥감이었던 동물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나 오토바이, 제스처가 큰 이성 등에 끌린다고. 아내는 노래도 곧잘 부르고 춤도 예쁘게 잘 추니 남성의 본능을 타고났을 아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도저히 상대가 못 된다. 실은 나의 예능적 자질이 아내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지는 걸 끝끝내 인정하지 못하고서 인류의 유전적 본능과 고대의 문화가 어쩌니 하며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만 늘어놓고 있다.


비단 말투와 행동뿐만은 아니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나서 변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루에도 아내의 기분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락가락할 때가 많다. 아이가 사랑스러워 못 참겠다는 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바라보다가도 10분이 채 안 돼서 입에서 ‘식빵 식빵’거리는 분노로 가득찬 소리가 나온다. 영문도 모를 울음을 와락 터뜨리거나 늦은 밤 자다 깨다를 반복하거나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아이의 행동에 따라 기분이 수시로 변하는 탓이다. 가끔 아이를 대신 봐주시는 고모님으로부터 ‘정신병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조심성이 깊어지기도 했다. 아이의 웃음, 울음, 순간의 표정, 몸짓, 손짓, 뒤집기를 하는 방향, 잘 때의 몸부림까지 하나하나 모든 걸 걱정스러워한다. 특히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해가 갈까 봐 매일같이 쓸고 닦고 소독하기를 반복하는데,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 때문이라지만 위생에 대한 강박관념은 과하다 싶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우리집에서 바나나 하나를 먹기 위해서는 손을 네 번이나 씻어야 한다. 우선 이마트에서 쓱배송으로 온 택배 박스에 분무기로 알코올액을 뿌려 소독하고 손을 비누로 씻는다. 박스에서 꺼낸 바나나 포장을 한번 더 알코올 솜으로 닦고 손에도 손소독제를 바른다. 마침내 포장을 뜯어 꺼낸 바나나를 바로 먹어서는 안 된다. 껍질을 알코올 솜으로 또 닦고 역시나 손을 다시 씻는다. 바나나를 먹은 뒤에도 손을 다시금 깨끗하게 박박 문질러 씻어야 한다.


아무리 아이 때문이라지만 예민과 강박과 조울의 경계선상에서 매일을 지낸다. 이게 사람 사는 건가 싶어서 아까 했던 말을 또 하게 된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정신적 변화뿐만 아니라 육체적 변화도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얼마 있지 않아 예전의 몸으로 돌아오겠지 했건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아내의 몸은 회복이 더디다. 이제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었음에도 쉬이 덥고 땀이 흘러서 선풍기가 쉴 틈이 없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허리와 손마디가 쑤시다며 끙끙대는데 벌써부터 할머니 되기 예습이라도 하는 듯하다. 매일같이 아이를 안아줘야 하니 몸이 여기저기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열 달 동안 아이를 품느라고 부풀었던 배 둘레는 여전히 예전의 사이즈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이에게 들려주려고 동요 ‘곰 세 마리’를 틀 때마다 “아빠곰은 뚱뚱해 엄마곰은 날씬해.”라는 가사를 바꿔 부른다. “아빠곰은 뚱뚱해 엄마곰도 뚱뚱해 애기곰도 너무 통통해.”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동지여, 자네도 드디어 매년 한 치수 큰 바지를 새로 사야 하는 사람들의 세계로 왔군요, 입장을 환영하오ㅡ라고 깐죽거리며 놀리다 보니 아내의 표정이 심상찮다. 언젠가는 결국 등짝을 세게 얻어맞을 것 같다. 이렇게 장난질을 치긴 하지만 언제쯤이면 아내가 건강했던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걱정된다.


무엇보다 낯선 순간은 어느 날 저녁, 아내가 갑자기 나를 가만히 안더니 수줍은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던 때였다.


“아이 키우는 거, 같이 열심히 해 줘서 고마워. 출근하느라 힘들 텐데 매일 밤마다 나 대신 애 옆에서 잠도 자고. 많이 피곤하지?”


경상도 남자의 영혼을 지닌 서울 여자가 아니랄까 봐, 평소에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표현을 하기 무척 힘들어하던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좋은 남편이자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그동안 나름 노력했던 게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허리가 아파서 매트에서 잠들지 못하는 아내 대신 매일같이 아기 침대 옆에 매트를 깔고 누워 홀로 잠을 청했던 보람이 있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한 내 입은 경솔하게 혀를 놀렸다 또. 나는 어째서 예나 지금이나 진지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건지.


“그래? 고마우면 가슴이나 한번 만져보자. 나도 진이처럼 쮸쮸 줘.”


“이게 미쳤나?! 매사 아주 장난질만 치려고 하지!”


버럭 화를 내는 모습이 퍽 반가웁다. 이제사 익히 알고 있던 아내다운 모습이다. 내가 실없는 농을 치면, 아내가 화를 내며 타박하고,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뒤늦게 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오는 농담이라, 결국 둘이서 깔깔거리면서 배를 잡고 웃던. 아이가 없었을 때 우리 둘만으로도 즐거웠던 그때 그 장면이 일순간 재현됐다. 육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놔버린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우리 둘만의 익숙했던 세계였다. 이제는 육아라는 낯선 세계를, 처음으로 엄마가 된 낯선 모습의 아내와 함께 헤쳐 나아가고 있다. 아이를 기르면서 아내는 얼마나 더 낯설어지고 그동안 내가 몰랐었던 새로운 모습들을 더 보여주게 될까. 아이가 성장해가는 걸 지켜보는 만큼이나 아내의 변화를 목격하는 게 자못 흥미롭다.


그리고 나는 훗날, 지금과는 얼마나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아내만 변해가는 건 아닐 게다.



까르르르르르 까꿍!
영차영차. (아직까진) 남산 같은 엄마 배를 기어오르자.
역시 엄마 품이 짜릿해. 늘 새로워. 편안한 게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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