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마다 꼭 챙겨보는 TV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KBS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하는 <이십세기 힛-트쏭>. 제목 그대로 1980년대부터 2000년까지, 지난 20세기에 히트한 가요들을 주제에 맞춰 1위부터 10위까지 보여주는 차트쇼다. 리어카 완판 히트송, 청량음료 같은 히트송, 고음 자랑 히트송, 최고의 혼성 그룹 히트송 등등 매주 다양한 주제로 흘러간 노래들을 소개해준다. 첫 시청은 산후조리원에서였다. 코로나 19 때문에 하릴없이 방에 갇혀 하루종일 TV만 보던 중 익숙한 음악과 영상들이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것 아닌가. 예전 까까머리 시절에 좋아했던 노래들이었다. 초반의 몇 회를 보면서 '요즘 흔하디 흔한 추억팔이 프로그램이네, 이게 얼마나 갈까.' 싶었는데 점차 빠져들게 된 나 같은 마니아들을 생성하며 1년 넘게 나름 성황리에 방영 중이다.
방송을 보고 있으면 중, 고등학생이던 때 즐겨 부르던 노래들이 나와서 퍽 반갑다. 특히 부활, 김경호, 김정민, 김민종, 에메랄드 캐슬, K2, 야다, 임재범 등등 남자 고등학생들의 영웅들이 등장할 땐 유난히 반가웠다. 학창 시절 노래방에서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부르던, 아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고음을 올리려고 애쓰게 만들던 록발라드의 대가들. 이렇게나 반가운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나. 옛 기억을 떠올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된다. 희한하게도 예전에 부르던 노래들은 가사가 모두 기억난다. 수학 교과서에 있던 공식 따위는 하나도 기억나질 않는데. 하지만 노래를 부를수록 아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진다. 학생이던 시절 '그런 거' 따위 부르는 남자들이 제일 싫었다고. 특히 임재범의 '고해' 같은 노래는 노래라기보다 차라리 소음 공해에 가까웠다고 한다.
비단 이 프로그램에서뿐 아니라 추억의 스타들이 계속해서 소환되는 요즈음이다.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작년에는 이효리와 비, 탁재훈 등 왕년의 스타들을 불러오더니만 최근에는 sg워너비, kcm, 김정민 같은 가수들이 다시 TV 화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에, 김정민이라니. 저 형님 하나도 안 늙었잖아. CD장으로 달려가 김정민 베스트 앨범을 오랜만에 꺼내 틀었다. 나 역시 '그런 거' 따위를 불러대던 남자였기에 아내의 질색하는 표정을 짐짓 모른 척하고서 또다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역시나 전주만 몇 초 들었는데도 무슨 곡인지 기억이 나고 뒤이어 가사가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이 정도면 거의 자동재생과 다를 바 없다.
"이이젠 눈물을 거어둬어어 하늘도 우우릴 축복하잖으아아."
그러고 보니 이 노랠 노래방에서 처음 부르고서 자그마치 20년이 넘게 지났다. 이렇게나 세월이 흘렀다.
이뿐만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유튜브로 소위 '탑골' 영상이라 불리는 예전 음악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다. 거의 20여년 전 가요톱텐, 인기가요 같은 프로들. 우리 세대에게는 예전 학창 시절의 추억을, 지금 세대에게는 지금도 활동 중인 스타들의 옛 모습이라든지 지금과는 다른 낯선 그때 그 모습이 재미를 준다.
우리는 옛날 노래를 왜 자꾸 듣는 걸까. 90년대 가요가 명곡이 많긴 하지만, 단지 노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노래가 환기시켜주는 그때의 우리 모습이 떠올라서일 게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때가 못내 그리워서 영상으로나마 그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것 같은데 이제는 도무지 그걸 찾을 방법이 없다. 소찬휘의 '현명한 선택'을 따라 부르며 신나게 몸을 흔들다가 문득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 노래가 나왔을 때 나는 사랑이고 이별이고 사회생활이고 세상이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뭣 좀 안다면서 제법 머리가 커진 티가 나는구나.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차에서 항상 트시는 음악이 있었다. 오래된 60, 70년대 트로트 음악이었다. 음질도 지지직거리는 것이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대체 왜 이런 음악을 들으시는 걸까. 당시 히트하던 인기곡들도 있었는데.
"아빠, 뭐 이리 옛날 노래를 듣습니꺼? 요즘 태진아, 송대관, 설운도도 있고 '신토불이' 이런 거 인기 있다 아입니까?"
"에이, 고마 치아라. 요새 노래가 그기 노래가? 영 파이드만. 이런 게 진짜 트로트제."
아버지께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며 '요즘 음악'은 영 들을 게 못 된다며 한숨 쉬셨다. 본인이 젊었던 시절 들으셨던 음악이 최고라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나도 당신의 모습과 똑같이 20, 30년 전 음악인 90년대 음악을 듣고 있다. 이제 겨우 13개월 먹은 아이. 아버지와 나눴던 대화를나의 아이와 함께하게 될 때쯤이면 지금으로부터 최소 10년은 더 남았으니, 그땐 거의 40년 묵은 음악을 듣게 되는 셈이다.
이 아이는 당연히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희미한 전설로만 전해 듣게 될 거고, BTS라는 오래된 아재들이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는 것도 인터넷 기사로 검색해야 알 수 있을 것이며, 자기가 태어나던 해에 있었던 코로나 19 팬데믹은 역사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사건이 될 거다. 그때가 되면 이 아이에게는 내가 얼마나 옛날 사람처럼 보일까. 내가 즐겨 듣는 90년대 가요가 얼마나 흘러간 노래처럼 느껴질까.
아이와는 나중에 어떤 음악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으려나. 아니,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대화가 통하긴 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세대 격차를 뛰어넘어 원활한 소통이 가능할까. 지금부터 '조기 소통교육' 차원에서 아이와 함께 유튜브 탑골 영상을 봐둬야겠다. 매번 너한테 맞춰서 핑크퐁이나 뽀로로만 봐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나저나 아직 말도 못하는 아이하고 무슨 소통 걱정이람. 걱정도 하도할샤 병이다 참. 다이어트는 내일로 미루고서 잔뜩 얹은 휘핑 크림마냥 부풀어 오른 걱정을 한 스쿱이나마 덜어내고, 지금의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음악 스트리밍 앱을 켰다. 나는 90년대 가요도 좋아하지만 현재의 톱 100곡이라든지 인디 음악들도 제법 찾아 듣는 사람이다.나 아직 요즘 사람이라 자부하며 음악을 틀었다.
그런데 인기곡이랍시고 틀어보니 어째 십수 년 전 인기를 끌었던 sg워너비,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군인들이나 듣던 브레이브걸스, 라붐 같은 팀들이 차트를 도배하고 있다. 혹시나 해서 빌보드 차트를 확인해보니 마치 70년대 소울 R&B가 떠오르는 실크 소닉, 역시나 앞선 세대의 디스코 음악과 딱히 다를 바 없는 두아 리파 등이 상위권에 자리 잡고 있다. 이게 무슨 요즘 음악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