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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n 06. 2021

조선시대에는 노비도 육아휴직을 했다

그런데 매일 이런 날이 반복되는 걸 휴직이라기엔...

 조선 세종 4년 때의 일이다. 예조에서 세종에게 한 장의 계를 올렸다. 내용인즉슨 “성균관의 생원과 학당의 생도들이 휴가가 없어 어버이를 뵙지도, 옷을 세탁하지도 못하니 매월 초 8일과 23일에 휴가를 달라.”는 것이었다. 세종은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균관의 휴가제도가 생겼다. 북방에서 경계를 서는 병사들에게는 열흘 간의 결혼 휴가, 상을 당하면 고향 집까지 다녀올 수 있도록 100일 휴가를 주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관에서 일하던 노비를 위해서도 육아휴직 제도를 만들었다. 여자 종인 비가 아이를 낳으면 100일의 출산휴가와 더불어 1개월 간의 복무를 면해 줬으며, 남자 종인 노에게도 아내의 출산 후 30일간의 남성 육아휴직 제도를 만들어 준 것이다.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남편 구실을 해야 한다.”는 어명과 함께였다.


 조선시대 노비도 썼던 육아휴직을 나라고 왜 못하겠나.


 아내는 아이를 낳고 나서 계속 몸이 안 좋다. 좋지 않은 몸 상태로 아이를 돌보고 이유식을 만들고 유모차를 끌고 동네 산책도 시키고 아이 옷 빨래며 장난감 소독이며 온갖 집안일까지 한다. 매일같이 힘들어 죽겠다며 그늘 짙은 한숨을 밭았다. 나 역시 퇴근 후엔 육아와 가사 전선에 참전했지만, 고작 반나절만 함께하는 전우는 썩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이제 돌이 지나고 13개월을 맞이한 아이. 아빠, 엄마, 맘마, 까까 같은 말을 하고 혼자서 두 다리로 일어서 있기도 한다. 금방 혼자서 걸을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마주하게 되는 이런 소중한 순간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어졌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항상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젊었을 적 일하러 나가느라 너희가 크는 모습을 제대로 보질 못해 미안하다고. 그게 한으로 남았다고. 세대를 이어 같은 나 역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그래서 힘에 부쳐하는 아내를 돕고, 아이의 소중한 순간을 함께하며 제대로 '남편 구실을 하고자' 육아휴직을 신청하기로 했다.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쓰는 건 쉽지 않았다. 상사나 동료의 눈치가 보인다든지, 내가 빠질 때의 업무공백 같은 건 둘째치고 당장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이 가장 문제였다. 아내는 임신했을 때부터 이미 회사를 그만둔 상황이라 나마저도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엑셀을 켜서 매 월마다 기초, 기말의 예상 현금 잔액을 기입해가며 곰곰이 따져봤다. 국가에서 육아휴직 급여가 지원되는데 시작일로부터 첫 3달까지는 통상임금의 80%(최대 150만원, 최소 70만원), 4개월부터 종료일까지는 통상임금의 50%(최대 120만원, 최소 70만원)이 지급된단다. 다만, 매달 25%씩 공제하므로 실 수령액은 첫 3달 동안 112만 5천 원이며, 다음 달부터는 90만 원 정도였다. 공제된 금액은 복직 후 6개월 뒤에 신청하면 한 번에 입금된다. 여기에다 지역마다 다르긴 하지만 지자체에서 매월 지급되는 육아, 아동 수당이 약 30만 원 정도 들어온다.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이 돈으로는 도저히 세 가족이 살 수가 없다. 아파트 대출 때문에 달마다 백만 원이 넘어가는 원리금 상환도 해야 하는데 턱없이 모자란 액수. 이놈의 집은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다. 그래도 있는 편이 낫긴 하다. 빚 갚느라 허리가 휘긴 하지만 서울에 집을 가진 유산계급임에 감사하며 방법을 찾아봤다. 그리고 해결책을 발견했다. 회사에다 언론인 대출을 신청했다. 은행 대출로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의 대출인데다가, 휴직 기간 동안에는 회사에서 급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대출금 상환 역시 일시 중단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저축해놨던 돈과 새로 대출받은 돈을 합치면 6개월 정도는 휴직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그 이상은 무리였다. 그나저나 빚을 내서 빚을 갚으면서 생활하다니,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도 아니고. 모든 계산이 끝난 뒤 하나 둘 팀원들에게도 알리고 드디어 휴직 신청 기안을 올렸다.


 내가 육아휴직에 들어간다는 소식에 회사 동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걱정스러워했다. 김 과장네는 아내도 일을 안 한다며. 둘 다 일을 쉬면 생활은 어떡하려고 그래. 먹고 살 만한 걸 보니 원래부터 여유가 좀 있었나 봐. 몇 주 동안 늘 같은 질문에 웃으면서 늘 같은 답을 했다.


 “에이, 여유는요 무슨. 빚 내서 휴직하는 거에요.”


 웃으면서 말하니까 다들 농담이라고 생각하더라. 진짜인데. 남의 사정도 모르고.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첫 번째 육아휴직의 첫째 날.


 그냥 그렇게 순탄하게 휴직을 시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아이가 어떤 아인데 이런 날을 놓칠 리가. 아이는 휴직 1일 차 0시를 넘어가자마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통잠을 자게 된 지가 언젠데 왜 하필 오늘 새벽에 갑작스레 이러는 걸까. 쪽쪽이를 물려봐도 토닥거려봐도 안고 달래 봐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 기저귀가 빵빵한 것도 아니다. 배가 고플 시간도 아니다. 열이 나는 것도 아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랫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여전히 ‘아이의 마음이란 어렵고도 어렵구나’다.


 1년 넘도록 아이를 키웠는데도 아직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공포심이라는 건 정체를 알 수 없거나, 혹은 알더라도 대처할 방법이 없을 때 생겨나는 법. 지난한 육아의 과정에서 이럴 때마다 무서움을 느낀다. 아이의 무언가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였지, 몇 시까지 운영하더라, 아니면 좀 더 차를 달려가서 큰 병원 응급실을 가야 하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다행히 한참을 안고 달랬더니 아이는 다시 잠의 세계로 돌아갔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아침까지 푹 잠들어 주셨다. 간밤의 난리법석은 아마도 아빠의 육아휴직을 환영하는 신고식 같은 거였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선 멀쩡한 얼굴로 아이와 인사를 했다. 잠에서 깨어나 자기 침대에서 혼자 뒹굴거리고 있는 아이. 내가 방에 들어서자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빙글 돌리더니 두 발을 딛고 벌떡 일어난다. 어라, 아빠가 이 시각에 웬일이야, 하는 듯. 일어선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보고 씨익 하고 웃는다. 벌써부터 눈웃음치는 법을 익힌 걸 보니 나중에 여자 여럿 홀리겠다, 라며 김칫국을 마셔 본다. 영차, 하고 안은 뒤 거실로 나갔다. 밤새 불룩해진 기저귀를 갈고 따뜻한 물을 마시게 했다. 정신을 좀 차리게 한 뒤엔 이유식을 먹였다. 어제저녁에 아내가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 둔 걸 전자레인지에 45초를 데우면 딱 알맞은 온도가 된다. 이유식을 먹인 후엔 분유도 조금 먹였다. 아직까진 이유식과 분유를 함께 먹이고 있다. 다음 달쯤이면 분유를 완전히 끊을 예정이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이와 놀아준다. 그림책도 보고, 인형놀이도 하고, 소리 나는 퍼즐도 맞추고, 걸음마 보행기를 잡고 걷기도 하고, 집 안 여기저기를 같이 돌아다니며 함께 논다. 요즘엔 키도 훌쩍 크고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니 선반 위로 손을 뻗어 오디오와 턴테이블에 관심을 보인다. 아니, 관심이라기보단 ‘접촉’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겠다. 손에 닿는 모든 걸 만지고 심지어는 입에 넣으려고까지 한다. “에비, 그건 아빠 거야.”라며 못 만지게 하면 금세 얼굴을 찡그리면서 울음을 내뱉는다.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울어대는 게 성깔이 굉장하다. 누굴 닮았나 모르겠다. 아내도 아니라고 하고, 나 역시 어릴 때 그러지 않았다. 심증으로는 아내를 닮은 듯한데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별 수 없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만지게 한다. 그랬더니만 김현철 2집과 딥 퍼플 라이브 앨범 LP판을 손으로 마구 만지면서 DJ 흉내를 낸다. 오디오 전원 버튼을 켜고, 턴테이블의 바늘을 판 위에 올리고, 뱅글뱅글 돌아가는 판을 손으로 잡아서 멈췄다가 다시 돌리고, 뒤로 돌렸다가 앞으로 돌렸다가, 속도 조절을 하고, 턴테이블을 끄기도 한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걸 해내는 걸까. 애지중지하던 판은 망가지겠지만, 왠지 음악에 소질이 있어 보인다며, 또다시 김칫국을 마셔 본다.


 나의 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는 일이 있어 오전부터 집을 비웠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집 밖을 나섰다. 하루 종일 아이와 나,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점심 때도 이유식과 분유를 함께 먹이고 그새 가득 찬 기저귀를 갈고 한참을 놀아줬다. 칭얼거리기 시작하자 낮잠 잘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침대에 눕혀 토닥거려주니 금방 잠들었다. 아이의 낮잠 시간 덕분에 내가 점심 먹을 시간이 만들어졌다. 무얼 해 먹기도 귀찮아서 라면을 끓였다. 신라면엔 역시 계란을 넣어야 돼. 아이가 깰새라 얼른 라면에 계란을 푼다. 독거노인의 모양새로 혼자 라면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오전 내내 무언가 해 내긴 한 것 같은데 무얼 했는지를 모르겠다. 집에 있으면 이런 날들이 매일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겠구나. 불현듯 중학생 때 문제집에서 봤던 수학 문제도 하나 생각났다. ‘풀밭 한가운데의 기둥에는 몇 m 길이의 줄에 묶여있는 염소가 한 마리 있다. 줄이 닿는 반경 사이에는 염소가 들어가지 못하는 가로 세로 몇 m짜리 사각형 창고가 있다. 염소가 먹을 수 있는 풀의 전체 넓이는 얼마인가?’ 따위의 문제. 혼자서 아이를 돌보니 마치 내가 줄에 매여있는 염소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주 사랑스럽지만, 때문에 다른 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아이 때문에. 꺼어음메에에에. 밥을 먹고 난 후 트림 소리가 염소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아이가 깰까 봐 물을 약하게 틀어놓고 조심스레 그릇들을 닦느라 한참이나 걸렸다. 소파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오늘부터 휴직했다는 사실을 깜빡하고서 회사 인트라넷 앱을 켰다. 습관의 힘이란 무섭다. 그렄데 이상하다. 늘 몇 개씩 와 있던 수신 전화도 메일도 문서도 없다. 주말도 아닌데 어떻게 연락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지. 아 맞다, 나 오늘 재택근무가 아니라 내년 초까지 휴직이지. 기분이 좋으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한켠에 피어올랐다. 휴직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저 휴직하는 동안 회사 번호로 오는 전화 다 차단시켜 놓을 거예요. 절대로 연락하지 마세요.”라며 농반진반으로 으름장을 놓고 나왔는데, 정말 그래 주니 기분이 이상하다. 새삼스럽게 나라는 인간의 쓸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낮잠에서 깨어났다. 마침 시간 맞춰 아내도 집으로 돌아왔다. 외출했더니 오늘 바깥 날씨가 너무 좋단다. 집에만 있기 너무 아까운 날씨란다. 그렇다면 지금 산책하지 않는 자, 유죄.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서 밖으로 나갔다. 요즘엔 비가 자주 왔던지라 오랜만에 만나는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은 눈이 부시게 파랗고, 구름은 몽글몽글하게 하얗고, 나무는 진한 초록빛이고, 나뭇잎은 봄바람에 살랑거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들 웃는 표정이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다들 미소를 숨길 수 없을 만큼 날이 좋았다. 평일 낮에 회사에 안 가니까 좋긴 좋구먼. 이렇게 여유로운 나들이라니. 점심때 살짝, 아주 살짝 들었던 섭섭한 마음 따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통장 잔고만 허락해 준다면 2년이고 3년이고 휴직하고서 육아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선 아이를 씻기고 저녁을 먹이고 또 한참을 놀아주다가 밤 9시를 조금 넘겨서 재웠다. 이렇게 육아휴직 첫 번째 날이 끝났다. 이런 하루의 순간들을 거의 6개월 동안 매일 반복해야 한다. 기대가 되면서도 앞날을 알 수 없어 두렵기도 하다. 좋을 날만 있을 거라 기도해 본다. 아이도 나도 아내도 무탈하게 함께 잘 지내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며칠 동안 그렇게 아내와 함께 아이를 돌봤다.

 

“밭맬래, 애 볼래?”라는 질문에는 역시나 밭을 매고 싶다는 답을 하고 싶다. 그렇게 육아가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아내에게서 예전과는 다른 표정과 말을 보고 들을 수 있게 됐다.


 “진이하고 여기도 가 보고 저기도 가 보고,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고 싶어. 우리 내일은 뭐 할까.”


 달뜬 표정과 설레는 목소리로 내게 이런저런 말을 한다. 아이를 재우고 아내와 둘이서 맥주 한 잔 기울이고 있던 참이었다. 휴직 전만 하더라도 밤에 아내와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주로 “아이 낳기 전이 좋았다. 아이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 어디로든 도망가 버리고 싶다.” 따위 ‘과거+부정형’의 내용이었다. 한숨을 고명으로 얹은 가시 돋친 말들. 하지만 육아휴직을 시작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아내는 어느새 ‘미래+긍정형’의 어투로 말을 하고 있다. 내일을 기대하는 대화라니, 세상에.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눈에 눈물이 핑 고였다. 너 갑자기 왜 그래, 아내가 물었다. 아니, 이거 눈물 나는 게 아니라 맥주 마시고 트림을 했더니 눈이 시큰하네. 오늘 소화가 잘 되려는지 하루종일 자꾸 트림이 나와. 말도 안 되는 소릴 변명이랍시고 주절주절 늘어놨다.  


 그래도 육아휴직을 한 보람이 있다.




육아휴직 덕분에 평일 낮에 아이와 함께 산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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