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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10. 2021

마햄이 돌아왔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한 시절을 발견하다

※ 아이는 거실에서 놀다가 책장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꺼내곤 한다. 그중에는 자기의 그림책뿐만 아니라 내가 보던 책도 있다. 엊그제 꺼낸 책은 전공과목 교재 중 하나였던 <작문교육론>. 반가운 마음에 펼쳐 보니 웬 A4 용지 하나가 팔락거리면서 떨어졌다. 당시에 썼던 과제글이었다. 무려 10여 년 전에 썼던 글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대학생이었던 나는 롯데 자이언츠의 열혈 팬이었고, 사회 문제에도 나름 관심이 있었구나, 싶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한 시절. 이제는 야구 따위 좋아하지 않아서 그때의 내가 낯설기도 하다.  

 



 8888577.


 이렇게 나열된 숫자를 보고서 누군가는 중국집 전화번호라도 되겠지, 하며 별 반응이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가 사는 신림 9동의 양자강* 전화번호는 888-8365로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분노와 함께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를 떠올리면서. 이 숫자는 지난 7년 간 롯데가 시즌에서 거둔 순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야구에 대해서 관심 없는 사람은 전교 8등 정도면 잘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 프로야구의 전교생은 8명*에 불과하니 할 말 없는 성적이라고밖에.


 그랬던 롯데가 2008년 들어서 한국 야구 최초의 외국인,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깜둥이'라는 저급한 단어로 불리며 비하의 대상이 되는, 흑인 감독 로이스터를 데려온 뒤 달라졌다. 시즌 초부터 심상찮은 모습을 보이다가 시즌 최종 3위를 차지, 8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하게 된 것. 부산 사람들의 숙원이었던 '가을에도 야구하자'를 드디어 이루게 됐다. 기나긴 암흑기를 끝낸 로이스터 감독과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를 비롯한 선수단을 향해 모두가 열광했다. 감히 말이나 글로는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감동과 기쁨과 사랑이 넘쳐나는 가을이었다. 어쩌면 내년에는 부산시의 출산율이 조금은 높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코흘리개 아이 적부터 롯데의 팬이었던 나. 부산 경남 출신의 또래들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나 역시 부산 갈매기를 마스코트로 하는 그 팀의 팬이었다. 최동원이니 염종석이니 하는 전설의 선수들에 대한 동경도 늘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 2002년은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4강을 차지한 해가 아니라 롯데가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한 비참했던 때라고 기억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였을까. 부산 사람들만큼이나 나 역시 롯데의 선전에 감동하던 참이었는데, 올해는 더욱 감동적인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마해영 선수가 돌아왔다는 것. 마해영이라니 세상에.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그리운 이름인가.


 1995년 상무를 거쳐 프로에 입단한 마해영은 데뷔 첫해부터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으레 '최고의 타자'를 상징하는 4번 타자를 단숨에 꿰차며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대학과 상무 시절 선배였던 임수혁과 함께 '마림포'라 불리며 롯데의 준우승을 이끈 적도 있다. 1999년에는 무려 3할7푼2리의 타율로 타격왕을 차지하는 동시에 35개의 홈런까지 기록하며 롯데 팬들에게는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 타 팀 팬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저승사자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앞길이 창창했던 스타 선수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다. 2000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결성에 주축으로 참여하면서 구단의 미움을 받게 된 것. 어딜 감히 공놀이나 하는 운동선수 주제에 노조를 결성했다며 모기업의 괘씸죄를 샀다. 그는 정들었던 고향팀을 쫓기듯 떠나 삼성 라이온즈의 푸른 유니폼을 입게 됐다. 다른 팀도 아니고 삼성이라니, 상상할 수 없었던 일. 지난 1999년 포스트시즌, 롯데와 삼성은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인 적 있다. 삼성의 홈구장인 대구에서 벌어진 경기는 흡사 전쟁을 방불케 했다. 경기 중반, 홈런을 친 롯데 호세 선수에게는 맥주캔과 계란 등의 오물이 투척됐다. 분노한 호세는 배트를 관중석으로 집어던 퇴장당했다. 잠시 중단됐던 경기가 재개된 후 마해영은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동점 홈런포를 작렬. 그라운드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을 때 대구 관중들을 향해 보란 듯이 헬멧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화끈한 복수였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철천지 원수 같던 삼성으로 가게 된 마해영.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롯데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삼성 유니폼을 입고서 차지했다.


 이후에는 나이가 들며 기량이 점점 쇠퇴했다. 삼성을 떠나 기아, LG에서 뛰기도 했다. 2007년에는 2군을 전전했다. 1군의 11경기에서 허락받은 32번의 타석 중 그가 얻어낸 것은 고작 한 개의 단타와 한 개의 홈런. 그리고 1할도 안 되는 낯선 타율이었다. 그렇게 왕년의 스타 선수는 잊히는가 싶었다.

 

 그럼에도 나를 비롯한 롯데의 팬들은 그와 함께하던 순간을 가슴 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내내 그리워했다. 뭐랄까, 아무리 지우개로 지워도 흐릿하게 남아있는 연필 자욱 같달까. 마침내 2008년 올해, 그는 그립고 그립던 고향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등번호는 롯데에서 뛸 당시에 달았던 49번 그대로. 비록 연봉 몇십 억 원을 받던 거물급 스타 선수에서 고작 5천만 원이라는 형식적인 연봉에다, 입단 테스트도 받아야 했고, 붙박이 주전 선수도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초라한 대접임에도 그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고향 팀의 팬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런 마해영이 경기장에 들어섰다. 친정팀 복귀전이었다. 멀고 먼 길을 돌아서 온 고향팀에서의 다시금 첫 경기. 앞선 타석에서는 힘없이 물러났다. 그리고 8대 7로 앞선 8회 선두타자로 들어선 그.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따악. 맞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공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담장을 넘어갔다. 홈런이었다. 비거리 115m짜리 우월 솔로 홈런. 드라마도 이렇게 극본을 쓰면 너무 비현실적이라며 욕을 먹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아아, 마햄! 돌아온 우리 마햄! 아직 안 죽었심더. 우워어어어어! 그 장면을 보던 나는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 롯데 팬들은 다들 나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게다. 지난 3월 말, 거리에서 눈물 콧물 찔찔 흘리며 우는 사람을 마주친 적 있다면 십중팔구 마해영 때문이었을 거라 장담한다*.


 마해영을 강산도 바뀐다는 10여 년 동안 이 팀 저 팀을 전전하게 했던 선수협 재결성 사건. 당시에는 큰 사건이었다. <100분 토론>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루기도 했다.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등 선수협의 주축이었던 선수들은 타의에 의해서 다른 팀으로 쫓겨나다시피 트레이드됐다. 대변인을 맡았던 강병규는 결국 은퇴한 후 연예인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선수협은 힘들었던 지난 탄생 순간을 거쳐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모든 야구 선수들의 권익 보호와 야구 발전에 힘쓰고 있다.


 주축이었던 마해영은 '돌아온 탕아'로 팬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양준혁은 변함없이 삼성 팬들에게 '양신'이라 불리고 있으며, 송진우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아직도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던 해고 노동자들은 언제쯤 자신의 일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마해영이 고향 유니폼을 10여 년 만에 다시 입은 것처럼 기륭전자, 이랜드, KTX, GM 대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 역시 자신들의 작업장 유니폼을 다시 입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한다. 그날이 오면, 부산의 롯데 팬들이 느끼는 기쁨을 전국의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때 즈음에는 부산시뿐만 아니라 전국의 출산율이 조금은 높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1. 신림동 고시촌에서 동기들과 함께 살면서 시켜 먹었던 양자강 짜장면이 대체 몇 그릇이나 되는지. 어마어마한 수의 쿠폰을 모아서 탕수육으로 바꿔먹는 짓을 서너 번이나 했다.

2. 이후 NC, KT 이렇게 두 팀이 늘어서 2021년 현재 총 10개 팀으로 KBO 리그가 진행되고 있다.

3. 하지만 마해영은 성적 부진으로 그 해 여름 2군으로 내려갔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4. 초대 회장 송진우는 막판에 트레이드가 무산되어 한화에 남았다. 강병규는 몇 차례의 불미스러운 사건 이후 TV에서도 자취를 감췄다.




그나저나 작문교육론 수업을 열심히 들었으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글을 잘 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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