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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Feb 01. 2022

즐거운 연말인데 그럴 것까지야

2021년의 마지막 날 어느 식당에서

 지난해 매듭달의 마지막 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괜찮은 저녁을 한 끼 먹고 싶었다. 연말이라 왠지 들뜨기도 하고 새해의 둘째 날이 결혼기념일이기도 해서였다. 처갓댁에 아이를 맡기고 아내와 둘이서만 길을 나섰다. 연애하던 때와 비슷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끼며 밤의 강변북로를 달렸다. 우리가 갈 곳은 을지로에 자리 잡은 오래된 가게였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이태리 식당이며, 1967년부터 운영한 노포라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

 아내최근에 고모님과 이곳을 다녀왔더랬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면서 나와 함께 다시 이곳에 들렀다. 고모님은 실로 오랜만에, 정확히는 30년 만에, 여기 음식과 재회했고 여전한 그 맛에 울컥했다 한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아이와 함께 즐겨가는 단골집이 있었으면, 그 집이 오래도록 영업해서 아이가 자 아이 데리고 갔으면, 자리에 앉아서 "여기 아빠 어릴 적 할아버지하고 자주 오던 데야."라고 말좋겠다고. 어려운 일일 게다.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곳이라 오래가는 가게라는 게 몇 없. 그러고 보면 아내와 연애할 때 자주 던 대학로 천년동안도, 이태원의 펍 116-7번지, 중식집 홀리차우 본점, 홍석천의 아워플레이스, 상수동 화화 등지금은 죄다 라져 버리고 말았다.


 겨울 추위에 곱은 손을 호호 불면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자리에 앉아 두꺼운 옷을 벗어던지고 서둘러 주문을 했다. 이곳의 시그니쳐 메뉴라는 양파 수프를 비롯해서 칼라마리 프리타, 파스타 두 개, 후식으로는 젤라토. 그리고 이런 식사에 빠지면 섭섭한 하우스 와인도 한 잔. 그런데 아내가 시킨 링귀니 파스타는 금방 나왔는데 내 올드패션드 토마토 파스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말이라 바쁜가 봐." 하며 아내의 파스타 접시를 가운데 두고서 둘이 나눠 먹었다. 아까 수프가 나올 때도 한참이나 걸렸기에 이번에도 그런 건가 싶었다. 그렇게 절반이 넘게 먹었을 때 즈음에도 감감무소식. 결국 접시를 싹싹 비웠는데도 내 건 나오지를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여기요, 하고 서버분을 불러서 말했다.

 "제 올드패션드는 만들어지고는 있는 거죠?"

 서버라기보단 지배인이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중년의 남성 서버 깜짝 놀랐다는 듯 대답했다.


 "아... 주문하신 뉴가 하나 더 있었군요. 어째 한 접시를 두 분께서 나눠 드시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만."

 그리고 말을 이었다. 만 <서버 교본>이라는 책이 있다면 '손님에게 사과하기' 챕터의 표제 사진으로 쓸 법한 정석스러운 송한 표정과 포즈를 한 채로.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주문을 누가 받았죠? 저기 키 작은 남자분? 제가 단단히 교육시키겠습니다. 서비스로 와인 한 잔 더 드릴까요?"

 그 말을 듣고 역시 그랬군, 하며 아내와 눈을 마주쳤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주문이 제대로 안 들어간 탓이었다.

 "아녜요. 운전해야 해서 은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아... 정말 죄송합니다."


 서버는 거듭 죄송함을 표하고 사라졌다. 이내 내가 시킨 파스타가 드디어 나왔다. 이번에도 접시를 테이블 가운데 두고서 아내와 나눠 먹었다. 오래 기다려서 그런지 원래 맛있어서 그런 건지, 역시나 훌륭한 맛이었다. 그나저나 둘이서 한 접시를 나눠 먹는 게 그렇게나 이상한가. 어쩌면 와인도 한 잔을 시켜 나눠 마시는 걸로 보였나 보다. 우리 모습이 구리 료헤이의 단편소설 <우동 한 그릇>의 주인공들처럼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였던 걸까. 그렇다면 소설 속 가게 주인장처럼 2인분 같은 1인분 넉하게 주실 것이지.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던 중. 생각했던 것보다 적은 금액이 영수증에 찍혔다. 말로만 죄송한 게 아니었다는 듯 후식으로 먹은 젤라토는 공짜 서비스로 처리됐다. 예의 서버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나를 보고 찡긋, 하고 역시나 책에 나올 법한 정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예의 그 말을 했다.


 "식사는 괜찮으셨는지요? 그리고 제가 직원 교육 단단히 시키겠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아니... 안 그러셔도 돼요. 연말이라 바쁜데 그럴 수도 있죠. 진짜 괜찮아요. 저분 절대 혼내지 마세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빈말이 아니라 우리는 정말로 괜찮았다. 연애할 때부터 그래 왔다. 각자 시킨 음식을 가운데 두고 서로의 수저와 포크와 침과 애정을 한데 섞어 나눠 먹곤 했다. 그리고 연말의 즐거운 분위기를 늦게 나온 음식 따위가 망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이 없이 는 식사는 또 얼마나 홀가분한지. 실은 음식이 더 늦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 핑계로 고된 육아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를 조금이나마 유예고 싶어서. 여하튼 실수했던 서버분 역시 우리처럼 괜찮기를. 혼나더라도 많이 혼나지 않기를. 그를 혼내겠다는 말은 그저 화난 손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지배인의 립서비스 비슷한 것이었기를 바랐다.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번에 그냥 넘어가면 서버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실수하지 않을까. 서빙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을지도 모른다. 렇다면 오늘의 우리가 당한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음식을 늦게 받거나 아예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개중 누군가는 우리와는 달리 서버를 불러 화를 낼 테고, 그럴 때마다 지배인은 실수한 서버를 단단히 혼내고, 서버는 상환 불가능한 대출 이자처럼 쌓이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사표를 던지고, 그의 가족들은 울고, 이렇게 무너지는 가정이 늘어나면 한국 경제는 파탄이 날지도 모른다. 어설픈 선의는 장기적으로는 그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건 아닐까. 차라리 따끔하게 혼내 달라고 말하는 게 나았으려나. 지금의 혼남을 계기로 거듭날 수 있도록. 더 훌륭한 프로 서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예전에는 이런 일을 겪으면 금방 화냈다. 내가 내 돈 주고 서비스를 받는데 왜 참아야 하지. 잘못된 건 지적하고 소리를 질러서라도 바로잡았다. 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 이해심이 늘었다. 누군가가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면 그 모습을 견디기 어려워졌다. 같은 처지의 도시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밥벌이를 하며 그간 겪었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라서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 때문에 눈물 콧물 다 흘려가며 혼나거나,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잠깐의 틈을 빌어 담배 한 모금을 피우거나, 늦은 밤 퇴근하던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산 소주 한 병과 치킨 넓적다리로 하루의 시름을 잊거나, 집에 들어서자 세상 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반기는 가족들의 에 마음이 풀리는 모습 같은 것들. 삶의 이런 이면을 알고 있을진대 고작 음식이 늦은 것 따위로 화낼 순 없었다.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들어왔을 때보다 어둠은 더 짙추위는 더 사나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김현철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라고 노래 불렀는데, 배가 부르니 이곳 서울이 까보다 왠지 따뜻한 곳처럼 여겨졌다. 아내의 손을 잡고 도시를 환히 물들인 불빛 속을 걸으면서 속으로 바랐다. 수했던 서버도, 그를 혼낼 거라던 지배인 같은 서버도, 연말에도 쉬지 못하고 밤늦도록 일하는 이들도, 우리 직장인들 모두가 모쪼록 따뜻한  보기를. 오늘은 일 년에 한 번뿐인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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