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한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출근해야 하므로 길어야 10분 남짓.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리는 물방울을 맞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다. 주로 '흑역사'에 대한 후회와 함께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공상이다. 나는 어느새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처럼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첫 번째 여자 친구와 헤어질 때 그렇게 유치한 짓을 하지 말 걸, 언젠가 아내의 생일날에 괜히 다투지 않게 케이크를 미리 사 둘 걸, 가고 싶던 그곳의 최종 면접 때 까먹지 말고 준비했던 말을 꼭 할 걸, 지난 부서의 어느 회식날 술을 덜 마실 걸,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동생에게 평소에 잘 해 줄 걸. 흘러간 장면들을 떠올리고 지우려 하고 실제와는 다르게 재구성해 본다.
요즘엔주제가 바뀌었다. 이를테면 이런 생각들. 대학 신입생 때 네이버 주식을 샀어야 했다. 그 시절엔 다음과 엠파스와 라이코스와 야후와 파란과 네이버 등이 춘추전국시대처럼 다툼을 벌였는데 결국 패권을 차지한 쪽은 네이버였다. 신혼집이 자리했던 곳은 상수동이었다. 그때 빌라 전세가 아니라 "노 피어!"를 외치며 몇 억 원의 빚을 내서 밤섬 래미안 같은 아파트를 샀더라면 집값이 엄청 올랐을 게다. 속는 셈 치고 비트코인 초기에 몇백 만 원만 투자했더라면. 내가 알던 때로부터 천 배가 넘게 뛰었으니 계산해보면얼마야 대체. 그 돈으로 마포나 강남에 아파트를 몇 채 사서 전세를 주거나 반전세를 줘서 월세를 받아먹고, 남는 건 재개발을 노리며 서울 어딘가의 빌라나 주택을 사고, 지금 타고 다니는 차는 외제차로 바꾸고, 강원도나 제주도의 콘도 회원권도 하나 살까. 아, 물론 회사는 때려치워야지. 일순 정신을 차려보면 여지없이 '부자 되는 꿈'에 젖어 입을 헤벌쭉거리는 중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벌어진 입을 다물고서 샤워기를 끄고 머리를 흔들어서 물기를 털어냈다. 물방울과 함께 부질없는 생각 부스러기들도 함께 떨쳐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나 역시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겠다며 과거의 역사를 바꿔 버리면 지금의 아이를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몇억 분의 1의 확률로 정자와 난자가 만나 아이가 탄생하는데 그걸 똑같이 되풀이하기는 불가능할 터. 과거가 뒤바뀜으로 인해 방실거리며 웃는 아들이 낯선 얼굴의 딸로 변해 있거나, 생각지도 못한 다둥이의 아비가 되어 있거나, 혹은 아예 우리에게 아이가 없는 낯선 현재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뜻하지 않은 비극으로 결말을 맺을 수도 있는 시간 여행과 부자가 되는 꿈은 여기서 이만 접어야겠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며칠 전 동기 B 형과 점심을 먹었다.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고백하진 못했지만, 그래서 그 형은 아마 꿈에도 모르겠지만 십 수 명의 동기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유인즉슨 나이를 한참 먹었음에도 아직까지 세상 물정 모르는 눈빛을 지니고 있어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지 못해 내뱉고야 말고, 선배건 동기건 후배이건 간에 눈치 보지 않고, 남들이 뭐라건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류의 사람. 당연히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재테크에는 젬병이고가장 좋아하는 건 레고로 스타워즈 데스 스타 조립하기다.뭐랄까, 어른이라기보단 아직까지 때묻지 않은 '소년의 맛'이 남아있는 그와 함께하면 별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편했다. 그에게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다. "형은 형수님 잘 만나서 복 받은 줄 아세요. 혼자 살았으면 어쩔 뻔했어."
그랬던 B 형이 밥을 먹으러 가자며 차를 끌고 왔다. 그간 본 적 없던 외제차였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내 사고 싶던 차였는데 아내가 화끈하게 질러도 된다고 허락했다며. 여의도 금융권에 종사하는 형수께서는 부동산 투자에 열심이었는데 최근 나름의 결실을 맺은 덕분이란다. 다음 달엔 아이 교육을 위해 목동으로 이사 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새로 들어가는 집은 종합부동산세를 내는 비싼 아파트라고 했다. 그는 예전에 비해 셈이 밝아졌다. 서울 어느 동네의 집값이 괜찮고, 금융권 대출은 어떻게 받는 게 좋으며, 실 거주 기간이며 양도세 등 부동산 정책과 세제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됐다. 그는 한 선배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 존경스러운 선배. 하지만 그 선배는 부동산 투자에 실패해서 자기 명의의 집도 하나 없더라며,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사람이 일순 한심스러워 보이더란다.
왠지 낯설어진 B 형(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2년 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나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왔다)하고만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게 아니다. 점심 식사 후 티 타임에 동료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으레 주식, 코인, 서울 집값, 혹은 무언가 기발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내용들뿐이다. 대화의 순서도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거다. 1. 누군가가 어떻게 많이 벌었다더라. 2. 우와, 대단하다. 3. 다른 누구는 거기에 투자했다가 망했다더라. 4. 에이, 바보 짓을 했네ㅡ 같은 차례로 이어진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회사에서의 업무 능력도, 성격과 가치관도, 외모와 차림새도 아닌 오로지 '돈'을 얼마나 벌었냐다. 우리는 왜 이런 얘기들을 지겹지도 않은 듯 매일같이 하고 있을까. 도돌이표처럼 반복한다 한들 우리 재산이 불어나는 것도 아니고 내 삶에 딱히 이로울 것 하나 없는데. 아니, 노후를 생각하면 이런 고민을 지금부터 해야 하는 게 맞는 걸까. 한참을 떠들다 보니 손에 쥔 종이컵에 든 아메리카노 색깔처럼 마음이 거뭇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보고 아이가 반가워서 현관 쪽으로 달려들지만 전염병의 시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씻는 게 먼저다. 아이가 한 걸음 다가오면 나는 두 걸음 뒷걸음질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마이클 잭슨이 빙의한 듯 한바탕 문워크를 펼친 뒤 옷을 벗었다. 나가서 얼른 아이를 안아주고픈 마음에 서둘러샤워기를 틀었다. 아침 때와 마찬가지로 길어야 10분 남짓. 하지만 아침 때와는 다르게 부자가 되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하루 내내 부동산과 재테크와 투자 이야기며 모니터에 뜬 숫자와 천 원 단위 콤마들과 그래프 따위들에 시달린 탓에 더는 돈에 대한 생각 따위는 단 한 조각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어째 아내의 얼굴이 어두웠다. "오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표정이 왜 그래." 아내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듯 한참을 입술을 달싹거리다 입을 뗐다. 어렵게 꺼낸 대답인즉슨 친구 K가 부럽다고. 그 친구는 서울 광진구의 미분양된 아파트를 하나 '줍줍'(이보다 더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했는데 요사이 집값이 어마어마하게 올랐다고 한다. 우리 역시 서울에 아파트를 소유한 나름 가진 자임에도 이상하게 부럽고, 친구에 비해 우리가 갑작스레 가난해진 것 같고, 지금 사는 데서 더 큰 평수로 옮길 수 있을까 걱정이고, 앞으로의 금리 인상을 고려해 볼 때 추가 대출이 가능할지 의문이며, 우리에게는 왜 K와 같은 운이 따르지 않냐며 마음이 어지러워졌단다.아내의 전에 본 적 없던 한숨 섞인 푸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더니 과연 그 말이 맞다. 대신 행복은 재산순이구나, 하고.
지난 대통령 선거 때. 투표장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마음속에 이미 정해 둔 후보가 있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도장을 찍으려다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생각이 떠올라서 멈칫했다. 잠깐만. 이 후보를 찍으면 우리 아파트값은 어떻게 되는 거지. 오르기는커녕 떨어지는 거 아니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볼까. 머리를 흔들어서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한동안 허공에 멈춰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곧이어 원래 점찍어 놨던 후보에게 도장을 찍고 투표장에서 나왔다. 잠시나마 못난 생각을 했던 자신을 탓하면서. 그날은 밤늦도록 TV로 개표 방송을 봤다. 대선 결과를 보면서 나만 그랬던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고, 이런 풍토가 합리적이라 받아들여지며, 이윽고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 일상화된 시대. 나남 할 것 없이 이러고 있으니 왠지 부끄러워졌다.
코로나 19 확산 초기, 위생에 극도로 민감해진 아내는 지갑의 돈을 꺼내 일일이 소독했다. 그날 밤 마늘밭 어딘가에 묻어 둔 돈항아리를 찾아 꺼내는 꿈을 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