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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Oct 04. 2023

할머니의 마음은 알 수 없어

할머니라고 해서 다 같은 할머니는 아니다

 할머니,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구부정한 허리, 비쩍 마른 몸, 고된 농사일로 인해 거칠어진 손. 외양뿐 아니라 손주들을 언제나 따스하게 반겨주시는 모습도 떠오른다. 끊임없이 먹을 걸 내어 주시고, 이제는 배가 터지기 직전인데도 아직도 모자라다며 계속해서 뭔가를 들고 오신다. 할머니도 앉아서 같이 먹어요, 말씀드리면 본인은 배가 불러서 괜찮으시단다. 오랜만에 전화하면 내 새끼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다며 반가워하신다. 하지만 장성한 손주들에게 방해될까 봐 먼저 연락하시는 법은 없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밭에서 캔 채소며 과일 같은 걸 싸 주시고 택배로 부쳐도 주신다. 아프신데 이러지 말고 제발 쉬시라고 말해도 못 들은 척하신다. 이렇듯 늘 다정하시고 아낌없이 주시는 사람, 할머니. 그러니 루시드폴도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라고 노래 부르지 않았겠나.


 아내와 연애하면서 내가 알던 할머니와는 다른 할머니도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아내의 할머님은 세련된 ‘서울 할머니’이시다. 오랫동안 이태원 인근에 사셔서 그런지 외국 음식을 가리지 않고 드신다. 피자나 파스타는 물론이거니와 팟타이, 딤섬, 스키야키, 타코까지 국적 불문이다. 나는 여태껏 한 번밖에 못 가 본 미국도 종종 들르셨다. 따님들, 그러니까 아내에겐 고모님들,이 사는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다녀오시는 것. 코로나 19가 유행하기 직전인 2019년 말에도 다녀오신 적 있다. 미국뿐만이랴. 대만이며 일본이며 홍콩 여행도 함께했다. 옷차림과 머리는 늘 단정하시고, 외출하실 땐 곱게 화장도 하시고, 구순이 넘으셨는데도 지팡이 없이 휘적휘적 걸어 다니신다. 여느 할머니들처럼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거나 경로당에 가는 건 끔찍이도 싫어하시고 댁에 홀로 있는 걸 즐기신다. 대체로 따스하시지만 마냥 그렇지는 않아서 때때로 아내나 아내의 고모님과 싸우고 며칠간 냉랭하실 때도 있다.


 아내의 할머님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나이 든 이들을 싸잡아서 나의 할머니처럼 ‘아마 이럴 거야’하고 일반화시켰던 건 아닐까, 하고. 할머니라고 해서 다 같은 할머니가 아니다. 요즘 말로 '사람 바이 사람'인 것이다.




 최근에는 식당 두 곳에 같이 가면서 새삼 할머니의 '다름'을 느꼈다.


 1.

 우리 동네에 노부부가 운영하시는 국숫집이 하나 있다. 가게 이름은 ‘장모님 국수랑 전’인데 내게는 장모님이라기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운 연배라서 ‘할머니네 국수랑 전’이라고 부르고 싶은 곳이다.


 처음 이곳에 들른 후 벌써 6년째다. 잔치국수를 좋아해서 자주 들르다 보니 사장 내외분께서도 어느덧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이와 함께 가면 "왕자님이 너무 귀엽네" 하며 웃어주시고 나갈 땐 마이쮸 두어 개를 손에 꼭 쥐어주기도 하신다. 아이는 눈치가 백 단이라서 다 먹고 나갈 때 즈음에 사장 할아버지 눈치를 슬쩍 살핀다. 오늘도 잘 먹었으니까 마이쮸 주세요, 하는 눈빛을 발사하면서. 마치 맡겨 둔 물건이라도 받아가려는 모양새다.


 아내의 할머님께서도 이곳에 자주 들르셨다. 들를 때마다 사장님들께서는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 같으세요”라며 이런저런 반찬을 더 내어 주셨다. 직접 담갔다는 김치며 소면이며 국수 육수까지 이것저것 싸서 손에 들려주시기도 했다. 할머니 없이 우리만 들른 날엔 “할머니는 왜 안 오셨어? 요즘 건강은 어떠셔?”라며 안부를 묻기도 하고, 또 이것저것 싸서 가져다 드리라며 건네주시기도 했다. 우리는 국수 한 그릇 먹으러 갔다가 더 많은 걸 매번 받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께서는 이런 행동이 고마우면서도 못내 부담스럽다며 오히려 국숫집에 발을 끊어버리셨다. 아니, 고마우시면 자주 들러서 국수를 팔아주셔야죠,라고 말씀드렸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국수 먹으러 가자고 이끌면 "내 입엔 싱거워"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보통의 할머니 같았으면 좋아라 하시면서 받은 걸 드시고, 국숫집 할머니와 오손도손 대화도 나누고, 오는 정만 있을 순 없고 가는 정도 있어야지 하며 이것저것 챙겨 오셨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의 마음이라는 건 바다처럼 넓은지라 어린 우리는 아직 가늠할 수가 없다.


 2.

 집에서 차를 타고 10여 분만 달리면 연희동이다. 이 동네에는 '유우'라고 나름 유명한 스키야키집이 있다. 얇게 저민 소고기와 각종 채소를 달달하고 짭조름한 양념의 국물에 데쳐 먹는 일본식 요리. 날계란을 비벼 먹으면 고소한 맛이 덧붙여져 더욱 맛스러워진다. 그 맛이 우리 입맛에도 아이 입맛에도 딱이어서 종종 들른다.


 가게 안은 앉고 서기에 다소 불편하다. 신발을 벗고 나뭇바닥을 걸어간 뒤 다다미방에 앉는 구조. 그나마 다행인 건 완전 좌식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필요는 없다. 식탁 아래 공간이 파여있어 다리를 아래로 내려서 펴고 앉을 수 있다. 하지만 아내의 할머님은 구순이 넘은 고령이시라 바닥에 앉았다 일어나는 것 자체가 힘드시다. 이곳에 몇 번 오신 후엔 다시 오지 않으려고 하신다. 그리고 어차피 일본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신다. 회도 초밥도 싫어하신다. 혹시 가족력인가, 싶었지만 같이 살았던 아내도 고모님도 돌아가신 할아버님도 일식을 좋아하는 걸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라 추측해 볼 뿐이다.


 예전에 아내에게서 얼핏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내의 할아버님은 무척 잘생기셨단다. 나는 생전에 뵌 적이 없기 때문에 긴가민가하지만 장인어른의 얼굴을 보면 그럴 만했다 싶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쌍꺼풀도 짙은 것이 '쌍칼' 박준규 배우와 닮은꼴이시니까. 얼굴값을 하던 할아버지 옆에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개중에는 일본 여자도 한 명 있었다. 내 마음대로 하나꼬(한국의 '영희' 같은 이름이란다)라고 이름 붙여 보자. 하나꼬상은 유부남인 할아버지를 무던히도 쫓아다녔다. 매정하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그녀와 함께 회도 먹고, 초밥도 먹고, 우동도 먹고, 소바도 먹고 그러셨을 터. 그 꼴을 곁에서 지켜보던 할머니의 속은 까맣게 썩어갔을 게다. 종종 담배도 태우시게 됐고. 그래서 그때부터 일식이라면 입에 대기도 싫어지셨던 거다. "하나꼬, 이 나쁜 기집애", 이러시면서.


 역시나 알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의 소녀 적 기억은 오래된지라 어린 우리는 정확하게 그려볼 수가 없다.




 오늘도 아이와 함께 할머니, 아이에게는 외증조할머니,를 찾아뵈었다. 거실 TV에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틀어져 있었다. 이국의 낯선 풍경과 사람들을 보며 눈빛을 반짝거리시는 할머니. 여전히 궁금하신 게 많고, 먹어보고 싶으신 것도 많고, 가 보고 싶으신 곳도 많고, 함께 하고프신 일이 많다. 나는 그동안 나이듦이라는 게 무서웠는데 할머니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 정도라면 괜찮겠는데? 

 



그래도 여느 할머니들처럼 명절 음식은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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