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K의 직장생활 중간정산 (6)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던 중이었는데 사연 하나가 소개됐다.
"철수 형님, '비틀스'와 '마이클 잭슨' 중 누가 더 위대한가요? 친구하고 논쟁이 붙었는데 대답 좀 해 주십시오."
두 아티스트들의 대단함과, 동시에 서로 비교 불가함에 대해서 한참을 설명하던 DJ 배철수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우문에 현답이었다.
"둘 다 위대한데요, 그렇지만 저는 '데이빗 보위'를 제일 좋아합니다."
현명한 DJ께서 30년째 진행하고 있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참 오랫동안 들어왔다. 누구나 다 힘들었다고 얘기하지만 개중에서도 특히 내가 제일 힘들었다고 기억하게 되는 고3 시절, 쉴 틈 없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던 하루 일과 중 유일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던 때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다시 차를 타고 야자를 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오던 오후 6시 반 즈음에는 늘 '철수는 오늘...' 이라는 코너를 들었다. Acoustic Alchemy의 'Ballad for kay'라는 차분한 기타 연주곡이 흘러나오고 배철수 아저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은 에세이를 전달하는데 그걸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금도 그 코너는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중인데, 어쿠스틱 기타 첫 소절만 들어도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 아련한 기분이 든다.
외로운 고시생이었을 때도 내 곁엔 역시나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엔 신림동 고시촌 비좁은 하숙방에 처박혀서 매일같이 블러나 스웨이드 같은 브릿팝을 들었다. 6월에 있었던 2차 시험이 끝났으니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나가 놀고 싶어도 지갑엔 땡전 한 푼 없는 데다, 남들 다 하는 연애도 안 하던 때였으니 방구석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홀로 음악만 들었었다. 낮에는 이런저런 팝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면서 분명 어디서 들어보긴 했는데 제목이나 가수를 몰랐던 음악들에 대해서 알아가고, 저녁 무렵에는 방바닥에 널브러져서 장판이 난지 내가 장판인지도 모를 상태에서 눈을 감은 채 라디오를 들었다. '무더위엔 역시 철수 아저씨 목소리가 시원한 소나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선 한동안 그 좋아하던 라디오를 듣지 못했다. 신입일 땐 야근이 잦아서 라디오를 듣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이었고, 이후에는 월급 받은 걸로 방에 TV를 들여놨으니 라디오와는 자연스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자차로 출퇴근을 하게 된 덕분에, 돌아온 탕자처럼 오랜만에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다시 듣게 됐다. 나라는 청취자가 떠났건 말건 아직도 철수 아저씨는 저녁 6시부터 8시까지의 시간에 변함없이 머물러 계셨다. 괜히 반가워서 문자로 사연을 보내 봤지만 소개되지는 않았다.
어느 날인가, 거의 오후 8시가 다 될 무렵이라 DJ가 엔딩곡 전의 마지막 사연을 읽고 있었다. 초보 운전자인 여성 청취자가 문자로 사진을 보냈다고 했다. 운전에 서툴러서 모르는 게 무척 많은데, 처음 보는 낯선 경고등이 떠서 운전하기가 불안하다는 내용이었다.
철수 DJ께서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한 번 뱉고서 멘트를 이어갔다.
"아, 제가 모는 차하고 달라서 잘 모르겠네요. 타이어 공기압이 부족하다는 경고 같은데...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성분들이 보통 전자제품 매뉴얼을 잘 안 보죠. 이런 건 매뉴얼에 보면 설명이 잘 되어 있을 텐데요."
그리고 "... 저는 디스크자키 배철수였습니다."라는 한결같은 엔딩 멘트를 끝으로 마지막 곡이 흘러나왔다. 어라, 이게 뭐지.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배철수도 썩은 나무 기둥 같은 성 편견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때 그 세대의 어쩔 수 없는 아재인 건가? 불편한 마음이 들면서 채널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 순간 갑자기 노래가 끊어지고 다시 방송이 시작됐다.
"마음이 영 찝찝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노래가 나가고 있는 중인데 죄송합니다. 방금 전 '여성'분들이 매뉴얼을 잘 보지 않는다는 말 취소하겠습니다. 남성분들도 그런 분 많죠.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건 남성, 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제야 답답했던 마음이 소화제라도 먹은 양 시원해졌다. 다행이었다. '나의 아저씨' 배철수는 아직까지 꼰대는 아니구나, 깨어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틀렸음'을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이 퍽 인상 깊었다. 그 나이대의 중년 남성에게서 쉽사리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니까.
회사에서는 DJ 배철수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사들이 많다. 아니, 많은 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다. 팀원들 앞에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네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데"라며 잘못된 것을 실은 잘한 것이라고 끝까지 우겨 대거나,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라는 말로 대충 넘어가기도 하고, 혹은 전임자나 외부 업체 탓을 하며 다른 누군가에게로 책임을 미루거나, 심지어 불과 십여 분 전에 자신의 입으로 말했던 것을 "내가 그랬다고?"라면서 짐짓 모른 척하기도 한다. 조금 더 나은 상사라고 해도 "~했다면 미안한데"라는 조건형 말투로 본인의 잘못이라는 건지도 모르겠고 이게 사과인지 아닌지 이도 저도 아닌 사과 비슷한 걸 하기도 한다. 잘못이라는 선행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후에 이어져야 하는 사과도 당연히 존재 불가능한 현실 너머 어딘가의 개념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왜 많은 상사들은 자신의 잘못에 사과하지 않을까? 시간과 경력으로 애써 쌓아 올린 리더로서의 권위가 흔들릴까 봐 걱정돼서일까. 사과를 함으로써 주도권을 뺏기고, 나약한 인간으로 보인다거나,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무시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건 일견 이해가 된다. 나도 연차가 쌓일수록 남에게 '죄송하다' 사과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니까. 하지만 권위라는 건 한 인간의 '완전무결한' 아우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문제가 생겼더라도 이를 인정하고 고쳐 나가려는 합리적 태도 등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어져 나오는 것일 텐데. 상사들에게는 그런 생각이 쉬이 들지 않나 보다.
모두가 배철수처럼 멋있게 늙어가는 사람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럼에도 나이를 먹고, 진급을 하고, 후배들의 수가 늘어갈 때 적어도 부끄러움이라는 건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못한 걸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얼굴이 화끈거리기라도 했으면 한다. 어째 나이가 들수록 늘어가는 게 성숙함이 아니라 낯짝의 두께뿐인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정신과 의사인 아론 라자르는 수천 건의 사과를 분석하고 난 후 저술한 <사과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세상, 우리는 부끄러움 없이 살기보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알고 제대로 사과할 줄 아는 선배를 만난 건 손에 꼽을 정도, '카더라' 통신을 통해 전해들은 상사를 합쳐봐도 한 손의 손가락을 전부 꼽지 못할 만큼의 숫자에 불과하다. 그들을 바라보며 나 혼자서 시작한 손병호 게임의 끝을 퇴직 때까지 과연 볼 수나 있을런지.
그나저나 우리 아들도 대를 이어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팬이 되려나. 갓 100일이 지났을 무렵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위켄드의 'Blinding light'를 들으면서 그루브 넘치게 다리를 퍼덕거렸던 걸 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인다.
※ 이제 만 4살 어린이가 된 아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철수 아저씨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송골매의 노래를 듣다가 "이거 배철수 아니야?!"라며 알아채길래 깜짝 놀란 적도 있다. 과연 조기교육의 보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