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작년 가을에 입사한 우리 팀 막내다.그냥 막내가 아니라 팀에서 유일하게 20대의 나이를 가진 한창 청춘인 막내다.
'공무원의 장점은 잘리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단점은 저 양반도 잘리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공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웬만해선 도중에 나가는 이 없이 대다수가 정년까지 채우고 퇴직한다. 또한 웬만한 회사들이 그렇듯이 경영 환경이 나빠지자 신입 채용인원수는 줄고, 비용 절감을 위해 외주 비중이 늘다 보니 정규직 인력 구조는 날이 갈수록 고령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직원들의 평균 연령이 어쩌니, 전체 직원 중 부장급 이상 비율이 몇 퍼센트니 하며 수치로 자세히 따져볼 필요도 없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옆 부서로 다섯 걸음 정도 걸어간 뒤 "부장님!" 하고 부르면 동시에 네 명이 뒤돌아본다. "누구 불렀어?" 한 명은 현재 부장이고, 나머지 세 명은 부장 명함을 달았다가 떼고서 이제는 곧 닥칠 퇴직 날을 세어가며 소일거리로 하루를 보내는 어르신들이다.
이런 회사에서 나이 어린 J는 외로울 게다. 나 역시 이 동네에서 젊은 축에 속하지만, 게다가 가장 나이 차이가 적음에도, J와는 열 살이나 넘게 차이가 나니까마득한 선배로 보일 수밖에. 사방팔방 죄다 나이 든 이들밖에 없어서 답답했을 터. 그래서인지 같은 팀의 H 형이나S 과장, Y 차장 등과 함께 우리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 말을 J에게 건네면 웃는 표정으로 늘 거절의 답을 들었다.
"오늘 점심 다 같이 어때요?"
"저 오늘 약속 있어요."
"그럼 내일은?"
"내일도요."
"음, 그럼 모레는요?"
"모레도요. 죄송해요."
과연 90년대생들은 예전 세대와는 달리 자기 의사 표현이 확실했다.
아저씨들과의 점심을 늘 거부하던 J였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부서 점심 회식에는 빠질 수 없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밥을 먹고 직장인들의 정해진 코스처럼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들렀다. '식후엔 커피'라는 규범은 누가 강제하지 않는데도 다들 철저하게 지킨다. 테이블에 잠시 앉아 있으니 각자 주문한 음료들이 나왔다. 부장님, 여기 따뜻한 아메리카노요, 이건 라떼구요, 과장님은 따뜻한 레몬차죠, 유자차는 저 주시면 되고요, 어라, 이 아이스는 누가 시킨 거죠. 쌀쌀한 바람이 부는 날이었음에도 얼음 들어간 음료가 어색하게 딱 한 잔 섞여 있었다. J가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J 씨, 이 날씨에 아이스라니. '얼죽아'네요."
손이 시려운 음료를 건네주며 별생각 없이 말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J가 놀란 눈으로, 그렇잖아도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래지며 대답했다.
"과장님, 그런 말도 아시네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저 그렇게 옛날 사람 아니에요. 그리고 얼죽아라는 단어, 나온 지 몇 년은 됐잖아요?"
갑작스런 늙은이 취급에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는 나였다.
저는 얼죽아도 알고, 반대말인 쪄 죽어도 따뜻한 음료를 마신다는 뜻의 '쪄죽따'도 알아요. 지상파 방송보다는 유튜브에서 클립 영상이라든지 <워크맨>, <가짜 사나이> 같은 (당시에) 핫한 콘텐츠도 즐겨 보구요. 최근에 가장 재밌게 본 TV 프로그램은 <신서유기 8>이에요. 인스타도 하고 페북도 하고, 틱톡은 눈팅만 하지만 여하튼 젊은이들이 하는 SNS도 다 해요.코난, 하면 떠오르는 건 <미래소년 코난>이 아니라 <명탐정 코난>이라니까요. 이렇듯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속으로만 꾹 참았다. 소위 '영 포티'가 어쩌고 "나 아직 한창 때야."라면서 한참이나 젊은 여직원들에게 추근거리던 아저씨들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나도 그래 보이면 어쩌나 하고 덜컥 겁이 났다. 10년 간의 회사 생활에서 배운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가, 닮고싶은 이를 따라가기는 어렵고 닮기싫은 이를 따라하기는 쉽다는 거다.그래서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 하고 웃었다.
그런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S와 L 과장, Y 차장이 대체 얼죽아가 뭔 말이길래 그렇게나 대화의 꽃을 피울 수 있냐고 궁금해한다. 그게 혹시 새로 나온 죽이냐고. 혹은 얼리 어댑터니 뭐니 할 때 그 얼인가. 아니, 얼굴 마담의 얼일 수도 있지. 낯선 단어를 처음 접한 이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건 아니고 '얼어 죽어도 아이스 음료'를 마시는 취향을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해주자 다들 어이없어한다. "뭐 그런 희한한 말이 다 있어요." 이분들은 정말 이 단어를 모르고 있었다. J가 나 역시 모를 거라고 오해할 만도 했다.고작 단어 하나일 뿐이라고 가벼이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소통의 어긋남이 쌓이다 보면 문득 세대 차이가 느껴지고, 감정의 벽이 생겨나서 점점 그 벽이 높아지고 단단해지다, 끝내는 서로가 겹쳐지지 않는 이쪽과 저쪽의 평행선처럼 거리를 두게 되는 법이다.
얼죽아를 아는 사람, 그런 단어를 아예 들어본 적 없는 사람, 그런 걸 안다고 아직 젊다고 착각하는 사람, 그러든지 말든지 곧 정년퇴직이니 별 신경 쓰지 않는 사람까지. 참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모여 있고, 그럼에도 연령과 계층별로나뉘어섞이지 않고 구분되는 곳이 회사구나 싶다.바라건대 이곳에서 나는 모쪼록 덜 빠르게 늙었으면 한다. 단지 요즘애들이 쓰는말들을 많이 안다고 자랑스러워하지 않고, 예전에 있었던 일보다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젊은 사람으로. 바닷가 덕장에서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느라 지쳐버린 동태 눈깔 같은 얼굴을 한 그저 그런 닳아빠진 직장인은 되지 말아야겠다. 그래야 90년대생, 이후의 00이나 운이 좋으면 10년생들과도 함께 앞으로 남은회사 생활을 무탈하게 해 나갈 수 있을 테다.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