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주말의 아침이 밝아왔다. 이상하게시리 쉬는 날 아침엔 나의 몹쓸 요리 창작열, 아니 창작욕이 이글이글 불타오른다. 이글거리는 엔리케 이글레시아스. 아아, 아내가 이딴 말장난 좀 하지 말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한테 뭐라고 한다.
여튼 오늘의 '당첨' 요리는 바로 애플파이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쩌다보니 내가 내일 애플파이 해 줄게, 라는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그 말을 하자마자 아내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을 봤다. 마침 오래돼서 냉동실에 넣어 둔 식빵 4조각, 역시나 사 온 지 꽤나 시간이 흘러서 탱탱함을 잃은 사과 2알이 냉장고에 있다. 이런 건 그냥 먹을 수가 없지. 내가 재창조해서 끝내주게 맛있는 걸 먹여주겠다고 빵빵 큰소리를 친 게 바로 어젯밤이었다. 술도 안 마셨는데 내가 대체 왜 그랬지. 일단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요리의 레시피가 그리 어렵지는 않은 듯 하다. 다행이다.
1. 요리 준비
자못 비장한 결기가 느껴지는 나의 뒷모습이다. 자아, 애플파이 만들기 시작이다. 고작 애플파이가 뭐라고 그렇게 비장한가.
실은 이건 단순한 요리가 아니다. 나의 마음 속 깊이 묻어놨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종의 의식같은 거였다. 꼬마요리사 노희지(대체 요리할 때마다 왜 노희지를 자꾸 들먹거리는 지 모르겠지만)를 롤모델 삼아 이런저런 실험적 요리를 해 나가던 요리꿈나무였던 초등학교 저학년의 나. 어린 나이지만 제법 요리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때였다. 그래, 이런 추세라면 파리의 르 꼬르동 블루까지도 노려 볼 만하다.
그러다가 어느날 애플파이를 만들게 됐다. 박력분으로 반죽을 하고 사과를 설탕에 졸인 후에 반죽에 넣어 같이 오븐에서 굽는다. 힌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아주 단순한 레시피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시커멓게 그을려서 딱딱한 과자처럼 된 파이 껍데기. 한 입 베어물면 주르륵 물처럼 흘러내리는 사과도 설탕도 아닌 무언가의 유동성 물질. 게다가 너무 뜨거워서 입천장이 다 데이고. 도저히 애플파이라 명명할 수 없던 '미확인괴식물체(UFO ; Unidentified Food Object)'는 그대로 모두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요리에 흥미를 잃고 요리 불구의 삶을 살아오게 됐다. 활활 타오르던 불을 단숨에 꺼버렸던 그 사건. 그러니까. 이건 나의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런 상처 치유의 장이 된 거다.
역시나 오늘도 계속 중인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애플파이의 재료는 간단하다. 이번 요리는 반죽을 직접 하지 않으므로 더욱 간단해졌다. 반죽 대신 식빵을 쓴다. 애플파이니까 당연히 사과도 있어야지. 우리는 무한도전에서의 '홍철없는 홍철팀' 따위가 아니니까. 그리고 흑설탕, 계란, 버터, 시나몬가루, 기호에 따라 레몬즙과 시럽까지.
이거 마치 범블비 얼굴 같지 않아? 눈 코, 그리고 노란 얼굴. 이런 시덥잖은 사진을 찍어가며 요리를 한 걸 보면 트리우마와의 대면이니 상처의 치유니 하는 건 다 헛소리였던 거다. 여러분, 이거 다 새빨간 거짓말인 거 아시죠오.
2. 재료 손질
부르주아는 식빵 테두리를 먹지 않는 법이다. 가위로 사각사각 겉 테두리를 잘라냈다. 오늘은 가위뿐만 아니라 포크와 칼 등등 외과적 도구들을 많이 사용하게 될 거다. 하얀거탑 장준혁이 된 기분으로 요리를 해 보자.
하얀 속살만 남은 식빵은 반으로 접어서 파이 껍데기로 활용한다. 잠깐만, 네모난 식빵 조각을 보니까 왠지 멘보샤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냉장고에 새우도 있지? 다음엔 멘보사야. 내 말을 듣자마자 아내의 표정이 또다시 굳어진다.
요리 초보지만 사과 깎기 하나만큼은 내가 아내보다 잘한다. 한 번도 끊기지 않고 한 번에 깎기 신공.
사과를 깍둑썰기 하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자유롭게 썰기로 했다. 크고 작고 네모지고 세모지고 이런저런 조각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함께하는. 각양각색의 사과 조각들을 보고 있자니 자유 민주주의, 똘레랑스, 무지개(장갑 말고) 뭐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대의를 나는 자그마한 애플파이 한 조각에서 구현하겠다. 이 열사 힘차게 외칩니다아.
3. 파이 속 만들기
애플파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파이 속이지. 누가 껍데기 같은 걸 핵심이라고 생각하나. 그래서 사과를 흑설탕에 졸일 땐 자못 진지하게 요리에 임했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우선 버터를 팬에 둘러서 녹인 뒤 사과를 넣고 흑설탕을 듬뿍 뿌렸다. 이때부터 뭔가 좀 불안했다. 계량을 정확하게 해야한다 진짜. 요리 못하는 애들이 손대중이니 적당량이니 이런 말 하더라. 레시피라는 게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요리 못하는 애들 중 한 명이 바로 나일 줄이야. 대충 막 뿌렸더니 설탕이 너무 과하다. 으으, 너무 달아.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시나몬 가루가 없다. 이럴수가. 짜장면 시켰는데 면만 나오고 짜장이 없는 꼴 아닌가.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 애플파이니까 사과만 달달하게 잘 졸이면 되지. 시나몬 가루의 부재는 굳이 비유하자면 짜장면에 단무지가 빠진 정도라고 해 두자. 근데 단무지 없으면 짜장면 먹기 힘들긴 한데... 어쩔 수 없다. 대신 상큼한 맛을 내보려고 레몬즙도 살짝 뿌려줬다.
4. 파이 껍데기(?) 만들기
파이 반죽을 직접 하지 않아도 돼서 참으로 다행이다. 이걸 어느 세월에 밀가루 반죽하고 앉아있나. 남은 식빵 조각을 반죽 대용으로 사용한다. 테두리를 잘라 둔 식빵을 얇게 펴면 된다. 밀대로 잘 눌러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집엔 밀대가 없다. 이거 어떡하지. 주먹으로 꾹꾹 눌러댈 수도 없고. 이리저리 부엌 선반을 열어보다가 그럴싸한 도구를 발견했다. 멸치 국묵 낼 때 쓰는 스덴 통이다. 원통 모양이라 그럭저럭 밀대의 대체재가 될 수 있겠다. 사실 누가 봐도 이건 밀대의 보완재도 대체재도 아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다. 물론 다들 알겠지만 잇몸을 쓰기 전에 그냥 이가 멀쩡한 게 최선이긴 하다.
힘껏 눌러서 밀어댔더니 두께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진행된다. 밀대로 내 배를 밀어도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요즘 바지가 안 맞아서 스트레스다.
5. 파이 속과 껍데기의 만남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식빵을 납작하게 누르고 있는 동안 사과 속이 적당하게 졸아들었다. 달큰한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고구마 맛탕 아님. 사진이 왜 이따구로 나왔지. 설탕에 푹 졸여진 달달한 사과 조각들이다. 불을 끄고 식혀주자. 고생했어. 이 더운 날씨에.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빵에다가 칼집을 내 봤다. 요리 만화를 보면 바게트 빵이건 무슨 빵이건간에 칼집같은 건 필수더라.
아래는 파이 속과 껍데기가 첫 도킹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있는 장면이다. 아 참, 세계 최초의 우주 도킹은 1966년 3월 16일 제미니 8호와 무인위성 아제나 간에 있었다고 한다. 도킹의 주역은 그 유명한 닐 암스트롱이다. 괜히 궁금해져서 한 번 찾아봤다.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 되고싶다. 어디 가서 이런 지식들로 입을 털어대면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5-1. 심화 과정 : 파이 껍데기 봉합수술
오늘은 내가 바로 하얀거팁 장준혁이다! 애플파이에 왜 계란이 필요하나. 봉합실, 아니, 봉합풀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식빵 쪼가리를 반으로 접어서 고정해야 하는데 그냥 접는다고 고이 접혀 알아러 붙을 리가 없다. 끈적한 계란물로 붙여주는 거다.
비주얼만 보면 제법 그럴싸하다. 생긴 것민 보면 맥도날드 애플파이와 유사한 형상(이라고 합시다 그냥)이다. 칼집 몇 개가 사물의 인상을 이렇게나 바꿔놓을 수 있다. 사람의 감각이란, 특히 시각은 참으로 얄팍하기 그지없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말이다. 나는 언젠가 감각세계 너머의 이데아,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6. 대망의 파이 굽기
오븐은 적당히 예열을 해 둬야 한다. 이런저런 글들을 읽어보니 보통 180도 정도에서 10여분을 달궈놓는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일단 예열을 한다. 나는 요리 초보니까 남들이 하란대로 해야된다.
봉합수술에 풀 역할로 사용한 계란물이 남았다. 요걸 파이 윗부분에 발라서 구워주면 노릇노릇 맛도 좋고 노오란 것이 보기에도 심히 좋다고 하였더라. 문제는 우리집에 브러쉬가 없다는 것. 뭐가 이렇게 없는 게 많아. 투덜거리면서 포크로 찔끔거리며 계란물을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숟가락으로 푹 퍼서 대충 퍼발랐다. 내가 그런 게 아니고 아내가 그랬다. 배고파 죽겠는데 포크로 깨작거리면서 뭐하냐고 역정을 낸다. 그러더니 손수 숟가락을 집어든다. 위대한 영도자는 역시 결단력이 남다르시다. 인민들이 굶어죽기 전에 신속하게 행동하셨습네다. 아아. 아내의 빠른 상황 판단에 감사하며 순식간에 계란물로 겉이 노오래진 4조각의 파이를 지옥의 불구덩이, 아니, 뜨거운 오븐 안으로 밀어넣었다.
한 20분 정도 구워야 하는데 배가 고픈지라 10분만 구웠다. 근데 5분 정도 더 구웠으면 바삭바삭하게 더 맛있었을 듯 하다. 역시 참을성이 필요한 게 요리다.
7. 플레이팅으로 마무리
사진이 참 잘 나왔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아내가 그새 치즈 계란말이를 만들고 블루베리 몇 알을 꺼내서 세팅했다. 커피를 내리고 포크도 올려놓으니 제법 그럴싸하다. 뭔가 인스타스러워.
그래서 맛은...?
다음번엔 설탕을 조금 줄여야겠다. 그리고 시나몬 가루를 꼭 사 오고. 계란물은 브러시로 예쁘게 발라주자. 오븐에서 최소한 15분은 구워주고. 그래도 맛이 '아예' 없진 않았으니 절반의 성공이라 해 두자.
오늘의 요리는 여기까지. 늘 떠올리는 말이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근데 나는 여기저기에 엄마들이 너무 많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