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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18. 2019

낡은 필름카메라를 장롱에서 꺼내들다

 2012년 즈음 고향집에서 '니콘 FG-20'이라는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가져왔다. 갑자기 사진이 찍고 싶어져서 아버지께서 젊었을 때 쓰시던 카메라를 장롱에서 찾아 들고 온 거다. 그런데 필름 한 롤, 그러니까 고작 36컷을 찍고 나선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생각만큼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아서였다. 카메라에 대한 지식이라곤 하나 없이 그저 휘뚜루마뚜루 셔터만 누르고 다녔으니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리가 있나. 퀘퀘한 장롱에서 벗어나 마침내 맞이한 광복의 기쁨도 잠시,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된 낡은 카메라는 다시금 방구석 어딘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처박혔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어느 LP며 필름카메라며 연필과 종이 같은 아날로그 물건들이 다시 인기를 끌게 되는 시대가 돌아왔다. 미끈한 DSLR이나 미러리스 카메라편리한 디지털 사진 여러장을 찍는 것보단, 투박한 필름카메라를 꺼내 조리갯값을 맞추고 노출을 조정하고 초점링을 돌려가며 느릿하면서 신중하게 한 컷에 공을 들이는 게 '남들과 다르며', 소위 '힙'하다고 환영받는 요즈음이다. 름지기 힙스터라면 한 손엔 아이폰, 다른 손엔 필름카메라 하나는 쥐고 다니는 모습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다 보니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이야. 어쩌다 이렇게 기술의 발전에 역행하는 반동의 움직임이 유행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팔자에 없던 힙스터가 되고싶어,


 방구석 어딘가에서 필름카메라를 다시 꺼냈다. 두 번째 광복의 기쁨을 맛본 카메라는 딱히 흠집도 없고 곰팡이도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배터리만 새로 넣으면 곧바로 사진을 다시 찍을 수 있겠는데. 심지어 가죽 케이스마저도 수십년 세월의 흔적 따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새 것 같다. 꼼꼼하고 부지런 성격의 아버지가 쓰셨던 거라 그런가 보다. 몇 년 되지 않은 듯한 양호한 외관과는 달리 이 카메라는 무려 1984년에 출시됐다. 서른 살을 훌쩍 넘다. 세상에, 나하고 동갑이다. 너 나하고 친구할텨? 동갑내기 사물과 폿집 테이블에 앉아 서로 소줏잔이라도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할 것 같다.


 추측해 보건대,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식이라는 존재가 태어나던 해에 무척이나 설레셨을 게다. 아버지도 아버지가 되는 게 처음이셨을 테니까. 나라는 존재와 처음 만나고서 얼마나 신기하셨을까. 이제 갓 태어난, 자신을 닮은 아이가 처음으로 세계를 마주하는 많은 순간들을 간직하고 싶으셨을 거다. 그게 바로 부모 된 자가 자연스레 지니게 되는 마음이고. 그래서 그 해에 갓 나온 신상 카메라를 바로 구매하셨던 게 아닌가 싶다. 이 카메라가 나하고 동갑인 이유를 그렇게 추측해 다.


 고향집 작은방 서재에 꽂혀있는 옛날 앨범에는 내 사진이 무척 많다. 갓 태어났을 무렵은 물론이거니와, 물이 담긴 대야에 홀딱 벗은 채 들어가 있기도 하고, 홀딱 벗는 게 취미였던지 백일날에도 과감한 누드를 선보였고, 어린이용 선글라스를 뒤집어 쓴 채 당시 인기가수 심신의 춤을 따라 추기도 으며, 생일 케이크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 여름 해수욕장에서 튜브를 타고 바다에 들어간 모습 등등.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도,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고 많은 장면들이 사진으로 갈무리되어 남아있다. 한 권은 모자라서 두 권의 앨범 빼곡히 남아있는 그 모든 순간의 흔적들이 아버지에겐 좋은 순간,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까.


 나도 아버지처럼 지금의 행복한 순간들을 영원으로 간직하고 싶어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파일의 형태가 아니라, 기왕이면 손으로 만지고 느 수 있 인화한 아날로그 필름 사진으로. 손 끝에 까슬거리는 감각이 느껴져야 실재한다는 느낌이 . 파일 따위는 언젠가는 나를 떠나 흡사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양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걱정된다. 각의 세계에 집착하는 걸 보니 쩔 수 없는 날 사람인가보다. 그래서 다시 필름카메라를 꺼내 손에 들었다. 매일 곁에 있는 아내를, 내년이면 태어날 우리 아이를, 그 아이가 커 가면서 함께하는 우리를, 매 순간 빛나는 지금의 순간들을 떠나지 못하도록 꼭 붙들어 두고 싶다.


 ...라는 나름 거창한 결심을 했건만,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고기를 잘 먹듯이 사진도 찍어 본 사람이 잘 찍더라. 그때의 결심 이후로 몇 년이나 흘렀건만 아직도 사진은 잘 모르겠다. 여전히 엉망이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에는 부끄러워서 올리지도 못할 만큼 서투르다. 카메라를 손에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엔 필름 감도, 조리갯값, 셔터스피드, 노출보정, 초점 맞추기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심지어 처음의 두세 롤은 필름을 거꾸로 끼우는 바람에 단 한 컷도 못 건지기도 했다. 그나마 이제는 필름 카메라에 대해 조금, 아주 조금, '가나다라' 정도는 알게 된 정도라고 해 두자.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생의 수많은 순간들 중 기억할 만한 순간들을 얼마나 더 사진으로 갈무리할 수 있을까. 욕심 부리지 않고 금씩 천천히, 하지만 꾸준하게 우리의 서사를 기록해 보겠다.





사진 찍는 폼은 그럴듯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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