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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Dec 06. 2019

노인이라면 게이트볼 정도는 칠 줄 알아야지

주간(週間) 필름 사진첩 네 번째

상수동 한강공원 도로변에 있던 게이트볼 회원 모집 문구

Nikon FG-20

Zoom-NIKORR 35~70mm 1:3.3~4.5 Lens

Kodak colorplus200 film

2016년 4월




 상수동에 살던 무렵엔 종종 집 앞 한강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서강대교에서 성산대교까지 30분 정도, 왕복으로는 1시간여가 걸리는 길이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운동복을 입고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고 있자면 마치 순도 100%의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역시 서울은 한강이지. 암, 그렇고말구. 서울로 상경한 시골 촌놈이 근 십 년 만에 마침내 한강변에서 살고 있다니 꿈만 같구먼, 하는 말도 안 되는 감상에 빠져있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평일에 휴가를 내고 낮 산책을 하다 보면 마주치는 광경 하나. 강변북로 고가도로 아래 기둥 옆 게이트볼장에서 어르신들이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둥에는 '게이트볼 회원 수시 모집'이라는 안내문도 큼지막하게 붙여놨더랬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무망치로 공을 딱, 하고 때리는 모습 꽤나 인상 깊었다. 공이 골대 사이를 데구르르 굴러 통과하자 주름살 고랑이 더 깊게 패일만큼 활짝 웃으면서 무척 즐거워하는 얼굴들. 름이 없었다면 소년의 얼굴이라 해도 무리 없을 얼굴들이다. 정한  없는 공의 향방에 따라 환호성과 탄식이 교차로 이어지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보면서 아이나 어른이나 승패에 열중하는 건 매한가지나 싶었다. 게이트볼이라는 것,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게임이다.


 돌이켜보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장면인데 이상하게도 게이트볼장을 지날 때마다 멈춰 서서 한참이나 어르신들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 즈음엔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 '제대로 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나이듦이라는 게 자격증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게이트볼 정도는 칠 줄 알아야 노인 자격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면서. 각컨대 소위 노인 자격증라는 게 있다면 취득 요건 목록에는 게이트볼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물든 백발, 나무로 만든 손때 묻은 지팡이, 고궁에서 조선 왕실의 역사 읊기, 경조사 봉투와 방명록의 한자 읽기 능력 같은 것들이 있을 것 같다. 젊은이들에게 "나 때는 말이야." 따위 말을 내뱉는 건 감점 요인일 테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고함 지르는 일 따위는 아예 노인 실격 사유에 해당할 거다.


 그나저나 한강변에 살면서 낮에 게이트볼이나 치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저 영감님들은 꽤나 부유하신 분들임에 틀림없다. 들 이 근처에 사시는 분들이겠지, 아마도.


 거실 창 밖으로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얼마나 비싼 지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된 후에 드는 생각, 아니, 어쩌면 시기 섞인 부러움이었다. 나는 대체 몇 년을 안 먹고 안 쓰면서 죽어라 노동해야 저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게이트볼장의 잘 차려입은 노인들을 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선 폐지 줍는 노인들과 마주치곤 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차림새, 다른 얼굴, 다른 표정이었다. 무성하게 자라난 짙은 그늘에 집어삼켜질 듯한 모습이었다. 나이는  같이 었지만 누군가는 햇볕 좋은 곳에서 즐거 게이트볼을 치고, 다른 누군가는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다세대주택 사이 그늘진 골목에서 허리 굽혀 박스종이를 주워야 한다. 삶이란 얼마나 얄궂고 잔인한가. 정반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삶의 아이러니를 느끼면서 괜스레 또 얄팍한 감상에 빠져들다.


 자세히 살펴보고 있자하폐지 줍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일을 잘하시는 영감님들은 공간과 간격을 잘 조정해서 수많은 폐지들을 빈틈없이 척척 재빠르게 정리하시고, 일에 능숙하지 못하신 분들은 종이 쪼가리 몇 개 주워 리어카에 싣는 데에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리곤 했다. 여기에서도 누군가는 더 가져가고, 다른 누군가는 덜 가져갈 수밖에 없다. '폐지 줍기 업계'도 빈익빈 부익부, 그러니까 상위 1%가 많이, 아니, 거의 모두를 가져가는 구조였다. 냉혹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곳에서마저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도대체 자유 경쟁의 마수가 뻗치지 않는 곳하늘 아래 있기나 한 걸까. 나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걸까.


 폐지 줍던 어르신이 끌고 가는 리어카를 바라보면서 불현듯 두려워졌다. 나도 어쩌면, 하는 불안감이다. 방금 전까지 게이트볼장의 어르신들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1~2020년)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OECD 국가 평균의 약 2배며, 노인빈곤율2018년 기준 43.4%에 달해 OECD 국가 평균의 약 3배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이런 판국에 안락한 노후 생활은 고사하고 자칫 백 살 무렵까지도 부단하게 일하며 살아야 것 같. 이트볼은 고사하고 밥벌이라도 가능하려면 평생 먹고 살 방도를 궁리하고 노동하며 살아야  수밖에.


 침내 노인이 되었을 때 나는 무얼 하면서 살고 있을까? 건강은 괜찮을까, 아내와 별일없이 함께하고 있을까, 벌이는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될까, 게이트볼은 아닐지 몰라도 소일거리는 뭔가 하고 있을까. 그 대단한 비틀스도 연가 'When I'm sixty-four'를 불렀을 때 본인들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몰랐을 텐데, 심지어 존 레논은 환갑도 훨씬 전에 총탄에 맞아 죽을 줄 상상도 못 했을 텐데, 나라고 해서 딱히 상할 수가 없다.


 나이가 더 많이 들기 전에 일단은 게이트볼 치는 법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폐지 줍는 연습 또한 미리 해 둬야겠다. 뭐든지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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