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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28. 2019

돌아가신 할머니와 우는 아버지들

주간(週間) 필름 사진첩 세 번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주인 없는 빈 집, 주인 없는 물건들
제삿상을 열심히 차리느니 살아 생전에 잘 하는 게 좋은 것
시골집 하늘은 눈치없이 푸르기만 하더라

Samsung AF Slim zoom 70s

Samsung zoom 35-70mm auto macro lens

Kodak gold 200 film

2017년 9월




 "엄마, 인제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말아!"


 아버지께서는 삽으로 흙을 퍼내 관에 뿌리면서 외치셨다. 울음기로 다분히 젖어있는 목소리였다. 장례 내내 무덤덤했던 나도 그때만큼은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어렸을 땐 아버지가 기만 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렇게나 다정다감한 사람이 세상에 또 없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더니 아버지께서나이가 드셔서 여러진걸까, 내가 이젠 아버지가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나이를 먹은걸까.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다더니. 에서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무언가는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아버지의 말마따나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내내 아프셨다. 허리 통증으로 인해 병상에 누워계셨고 종국에는 염증으로 인한 복수 때문에 배도 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 마지막 몇 주 동안은 목으로 아무것도 넘기실 수도 없었다. 물조차도 드실 수가 없어서 분무기로 입술을 적셔 드릴 수밖에. 물이건 뭐건 목으로 넘기시는 순간 죄다 토해내셨으니. 돌아가시기 2주 전 부산에 내려가 병원에서 뵈었을 땐 갈증이 심하신지 계속해서 물을 찾으셨다. 왜 물을 안 주냐고 가족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쥐어짜내 하실 수 있는 말씀이 고작 물을 달라는 원이셨다. 인간이 죽기 직전에 애토록 갈구하는 것이 고작 물 한 모금인 걸 보면, 문학이고 철학이고 예술이고 그런 것들은 죄다 죽은 것들일 뿐이다. 삶이 무척이나 덧없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할머니께서는 물을 내놓으라며 옆에서 간병하시던 당신을 계속 때리셨다고 했다. 왜 달라는데 안 주냐고. 빨리 내놓으라고. 발 한 모금만 마시자고. 기력은 쇠잔했지만 물을 갈구하는 의지만은 무서울 정도여서 때리시는 손이 제법 매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픔도 잠시.


 처음에는 탁탁! 치시다가,

 한참이 지나니 툭툭. 건드리시다가,

 나중에는 틱틱...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손을 반복해서 까딱거리며 당신의 팔을 미셨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저릿했다. 가시는 길에 마지막으로 그렇게나 원하셨던 물이라도 시원하게 한 모금 넘기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날의 부산행 이후로 할머니의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병문안으로부터 2주가 지난 그해 겨울 성탄절 새벽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세상을 구원할 누군가가 태어났음을 모두가 축하하는 날에, 나의 할머니는 모두를 남겨두 세상을 떠나셨다. 마침 이삿날이 겹치는 바람에 점심 때까지 허둥지둥 이사를 끝내고 대충 짐을 싸서 정신없이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은 채 문상객을 받고 수십 차례의 절을 하고 장례식장 구석에서 쪽잠을 자 장례 절차를 냈다. 발인을 끝내고 경남 하동의 할머니댁으로 내려가서 운구며 하관이며 산소 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야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일이 모두 끝났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모든 게 끝났다.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십여 년을 홀로 지내시다가 이제야 곁에 함께 누우시게 되었다.

 굳이 눈물이 나오진 않았다. 서른 평생을 할머니, 고모와 함께 살았던 아내와는 달리, 나는 기껏해야 명절이나 제사가 있을 때만 가끔씩 할머니를 뵈어서 그리 애틋한 정이 쌓이지 않았던 건지. 대학을 다니느라 서울로 떠나 온 지도 오래돼서 더더욱 뵐 일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눈물이 그다지 많이 흐르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관 이후 영정 사진을 들고 할머니가 사시던 집을 한바퀴 돌러 가는 때, 셋째인 아버지만큼이나, 아니 아버지보다 더 다정한 성격의 둘째 작은아버지가 울면서 외치다.


 "엄마, 인제 집에 왔다카이. 집이다!"


 몇 달 동안의 요양원, 몇 주 동안의 힘든 병원 생활 동안 할머니께서는 내내 하동의 집을 그리워하셨다고 했다. 집으로 가자고, 나는 병원이 싫다고, 여기 누워있는 건 더는 못할 짓이라고 하시면서. 하지만 돌아가신 후에야 이곳으로 다시 돌아 수 있으셨다.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할머니의 못다한 원을 풀어드리기라도 하듯 악 쓰며 소리치는 작은아버지를 보면서, 결국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동안 잘 참았었는데 이분들이 기어코 나를 울음에 젖게 만드신다.

 할머니, 이제는 모쪼록 아프시지 말고 편히 쉬시기를. 다정한 아드님들께서 많이도 울었더랩니다.


 한참이 지나 제삿날이 돼서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시골집에 들렀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할머니의 흔적들을 쓸고 닦고 빨래까지 했다. 냉장고를 비우고 장독을 열어 씻고 보일러실 앞 장작도 정리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빈 집 감나무에서 익어버릴대로 익은 채 바닥에 떨어져 버린 감홍시들의 잔해들도 주워 담았다. 할머니의 집쓰시던 물건마당의 나무도 풀도, 모든 풍경들이 그대로인데, 바뀐 건 그저 할머니께서 부재한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이제 할머니의 얼굴이, 할머니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간다. 나의 기억이라는 게 이토록 가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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