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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22. 2019

나는 커피 싫어한다니까

주간(週間) 필름 사진첩 두 번째

신혼집에 들였던 커피 머신들

Nikon FG-20

Zoom-NIKORR 35~70mm 1:3.3~4.5 Lens

Kodak colorplus200 film

2016년 2



역시 커피보다는 맥주. 익선동 펍 '에일당'에서

Nikon FG-20

Zoom-NIKORR 35~70mm 1:3.3~4.5 Lens

Fujicolor C200 film

2017년 2




1.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추가. 톨.사이즈.로 한 잔요."


 지금 돌이켜보면 별 것도 아닌 문장 하나. 하지만 이걸 제대로 발음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으로 카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던 때였다. 일생을 커피라는 단어 앞에 붙는 접두사로 '냉' 혹은 '뜨거운' 이렇게 두 개밖에 모르고 살았다. 게다가 나는 커피 맛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 마시지도 않던지라, 랜차이즈 카페의 메뉴판을 빼곡히 채운 낯선 단어들은 내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은 커피에다 넣어야 하는데 엄한 내 입에 가득 넣어버린 양, 입이 굳어 어버버거리다가 마침내 튀어나온 말은 '아이스 카메라'였다.


 "아이스 카메라 주세요, 아니, 카메리노. 아니, 이게 머라카노."


 푸훗.


 카페 알바분도 웃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친구도 웃고, 나도 겉으로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울었... 던 건 아니고, 밤새 커피 이름 읽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더 이상 이까짓 걸로 창피당하지 말아야지. 다행히 쓰기 공부까지는 필요 없었다. 고작 커피 이름 따위가 뭐라고 고생을 했다. 지금에야 이런 일을 겪으면 와하하ㅡ 하고 웃어넘겼을 텐데 그땐 뭐가 그리도 잘 보이고 싶었던 건지. 연애  땐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든 멋있고 잘나고 근사해 보이려고 애썼더랬다. 


 그래도 연습한 보람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와 마끼아또 따위의 단어들을 마치 처음부터 알았던 양 술술 말할 수 있게 됐으니까. 스타벅스든 커피빈이든 파스쿠찌든, 그 어디라도 가 보자구. 내가 죄다 주문해 줄 테니. 내가 바로 깨달음을 얻은 자로다.


 여름이 되었다. 여자친구는 늘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다른 걸 마시고 싶다며 주문해 달라고 한다. 그래, 얼마든지 마시고 싶은 커피를 주문하렴,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단다. 카캬커켜코쿄쿠큐 하며 입을 풀어본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또 낯설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줄래? 그게 어느 나라 말이니 대체.


 "... 자바칩 프라푸치노."



2.

 결혼 전 신혼집에 들일 가구며 가전 같은 걸 함께 보러 다녔다. 이게 바로 예비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재미 혹은 괴로운 일. 당연히도, 서른 몇 해를 다르게 살아온 만큼이나 서로 원하는 물건들 판이하게 달랐다. 한때 라디오PD를 꿈꿨던 나는 오디오와 스피커를, 차 마시는 걸 좋아하는 아내는 커피 머신 세트를 들여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물건 따위가 대체 왜 필요하지?'


 서로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먼 훗날에야 알게 됐다.) 게다가 나는 커피라고는 마시지도 않는데. 그 쓴맛 나는 검은 물 따위 마시는 걸 싫어하는데 말이다. 오디오는 둘이서 같이 좋은 음악이라도 들을 수 있지, 커피 머신은 너 혼자서만 커피 마시는 데 쓸 거잖아. 쇼핑이 거듭될수록 마음 속으로 불평과 불만이 한여름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서 함께 해 나가야 하는 '조정의 마술'같은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양보와 타협이 필요했다. 래, 오디오 받고 커피 머신 콜. 극적인 타협이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계속 혼자 살았으면 커피 머신 따위가 웬말이랴, 맥주 양조 기계 같은 걸 샀으면 몰라도.'


 결국 네스프레소니 들롱기니 일리니 하는 단어와 물건들을, 나에게는 참말이지 낯선 기표와 기의를 하나 둘씩 합치시켜 나가면서 신혼 살림 목록에 올리게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막상 써 보니까 나쁘지 않았다. 커피를 즐겨 마시진 않지만 아침에 은은하게 콧 속으로 퍼져오는 커피향은 꽤나 좋았으니까. 역시, 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이라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역할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3.

 커피를 내 의지로 내 지갑의 돈을 꺼내 사서 마신 지 십 수년이 흘렀건만 실은 아직도 커피 맛을 모르겠다.


 "저는 커피 말고... 음, 아이스티 레몬이요."


 직장 동료들과 점심 식사 후 카페에 가면 커피 대신 꼭 아이스티나 레모네이드, 혹은 주스를 시다. 다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혼자서 이런 음료를 시키면 호기심어린 질문이 곧바로 이어진다. 너는 커피를 원래 못 마시냐, 마시면 잠을 못 자는 예민한 몸이냐, 아내하고 예쁜 카페 찾아다니는  좋아하더니 왜 커피를 싫어하냐 등등.


 "그냥 써서 싫어요."


 내 대답을 듣고나선 다들 웃는다. 초딩 입맛이라 그렇구나, 와하하하. 그런데 커피만 파는 카페(그러니까 카페인건데, 뭔가 이상한 표현이긴 하다. 치킨만 파는 치킨집, 피자만 파는 피잣집 같은 느낌인가)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기본 메뉴인 아메리카노를 시킨 뒤 시럽을 잔뜩 들이붓는다. 그래야만 겨우 먹을 만해진다.


 쓴맛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머슴들에게 고봉밥을 배불리 먹여 일을 시키는 것처럼,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오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 같이 느껴져서 꺼려질 때 있다. 커피를 마시는 게 맛과 향을 즐기는 게 아니라 마치 자동차를 굴리려고 바닥난 기름 탱크에 갈색 휘발유를 억지로 들이붓는 꼴 같다. 마시고 더 일해라, 노예들아, 이렇게 닦달하는 모양새다. 노예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서 좋다고, 힘이 난다고, 맛이 좋다며 커피를 들이켜는 것이다. 일 그런 광경을 견뎌내야 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커피를 더 싫어하게 됐다.


 그나저나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 추어탕집엔 돈까스도 팔고, 보신탕집엔 백숙도 팔고, 횟집엔 유부 초밥도 파는 것처럼 커피집에서도 커피 말고 다른 음료를 꼭 같이 팔아줘야지 왜 오롯이 커피만 파는 카페가 있는걸까. 나는 커피 말고 아이스티를 마셔야 되는데, 아니면 에이드라도.


 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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