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보면 별 것도 아닌 문장 하나. 하지만 이걸 제대로 발음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으로 카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던 때였다. 일생을 커피라는 단어 앞에 붙는 접두사로 '냉' 혹은 '뜨거운' 이렇게 두 개밖에 모르고 살았다. 게다가 나는 커피 맛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 마시지도 않던지라, 프랜차이즈 카페의 메뉴판을 빼곡히 채운 낯선 단어들은 내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은 커피잔에다 넣어야 하는데 엄한 내 입에 가득 넣어버린 양,입이 굳어 어버버거리다가 마침내 튀어나온 말은 '아이스 카메라'였다.
"아이스 카메라 주세요, 아니, 카메리노. 아니, 이게 머라카노."
푸훗.
카페 알바분도 웃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자친구도 웃고, 나도 겉으로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울었... 던 건 아니고, 밤새 커피 이름을 읽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더 이상 이까짓 걸로 창피당하지 말아야지. 다행히 쓰기 공부까지는 필요 없었다. 고작 커피 이름 따위가 뭐라고 고생을 했다. 지금에야 이런 일을 겪으면 와하하ㅡ 하고 웃어넘겼을 텐데 그땐 뭐가 그리도 잘 보이고 싶었던 건지. 연애를할 땐 상대방의 눈에 어떻게든 멋있고 잘나고 근사해 보이려고 애썼더랬다.
그래도 연습한 보람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와 마끼아또 따위의 단어들을 마치 처음부터 알았던 양 술술 말할 수 있게 됐으니까. 스타벅스든 커피빈이든 파스쿠찌든, 그 어디라도 가 보자구.내가 죄다 주문해 줄 테니.내가 바로 깨달음을 얻은 자로다.
여름이 되었다. 여자친구는 늘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다른 걸 마시고 싶다며 주문해 달라고 한다. 그래, 얼마든지 마시고 싶은 커피를 주문하렴,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단다. 카캬커켜코쿄쿠큐 하며 입을 풀어본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또 낯설다.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줄래? 그게 어느 나라 말이니 대체.
"... 자바칩 프라푸치노."
2.
결혼 전 신혼집에 들일 가구며 가전 같은 걸 함께 보러 다녔다. 이게 바로 예비 부부만이 누릴 수 있는 재미혹은 괴로운 일. 당연히도, 서른 몇 해를 다르게 살아온 만큼이나 서로 원하는 물건들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때 라디오PD를 꿈꿨던 나는 오디오와 스피커를, 차 마시는 걸 좋아하는 아내는 커피 머신 세트를 꼭 들여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물건 따위가 대체 왜 필요하지?'
서로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걸 먼 훗날에야 알게 됐다.)게다가 나는 커피라고는 마시지도 않는데. 그 쓴맛 나는 검은 물 따위 마시는 걸 싫어하는데 말이다. 오디오는 둘이서 같이 좋은 음악이라도 들을 수 있지, 커피 머신은 너 혼자서만커피 마시는 데 쓸 거잖아. 쇼핑이 거듭될수록 마음 속으로 불평과 불만이 한여름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서 함께 해 나가야 하는 '조정의 마술'과 같은 일이므로 어쩔 수 없이 양보와 타협이 필요했다. 그래, 오디오 받고 커피 머신 콜. 극적인 타협이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계속 혼자 살았으면 커피 머신 따위가 웬말이랴, 맥주 양조 기계 같은 걸 샀으면 몰라도.'
결국 네스프레소니 들롱기니 일리니 하는 단어와 물건들을, 나에게는 참말이지 낯선 기표와 기의를 하나 둘씩 합치시켜 나가면서 신혼 살림 목록에 올리게 되었다. 결혼하고 나서 막상 써 보니까 나쁘지 않았다. 커피를 즐겨 마시진 않지만 아침에 은은하게 콧 속으로 퍼져오는 커피향은 꽤나 좋았으니까. 역시, 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이라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역할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3.
커피를 내 의지로 내 지갑의 돈을 꺼내 사서 마신 지 십수년이 흘렀건만 실은 아직도 커피 맛을 모르겠다.
"저는 커피 말고... 음, 아이스티 레몬이요."
직장 동료들과 점심 식사 후 카페에 가면 커피 대신 꼭 아이스티나 레모네이드, 혹은 주스를 시킨다. 다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혼자서 이런 음료를 시키면 호기심어린 질문이 곧바로 이어진다. 너는 커피를 원래 못 마시냐, 마시면 잠을 못 자는 예민한 몸이냐, 아내하고 예쁜 카페 찾아다니는 건 좋아하더니 왜 커피를 싫어하냐 등등.
"그냥 써서 싫어요."
내 대답을 듣고나선 다들 웃는다. 초딩 입맛이라 그렇구나, 와하하하. 그런데 커피만 파는 카페(그러니까 카페인건데, 뭔가 이상한 표현이긴 하다. 치킨만 파는 치킨집, 피자만 파는 피잣집 같은 느낌인가)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기본메뉴인 아메리카노를 시킨 뒤 달큰한 시럽을 잔뜩 들이붓는다. 그래야만 겨우 먹을 만해진다.
쓴맛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머슴들에게 고봉밥을 배불리 먹여 일을 시키는 것처럼,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는 행위가 오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후에도 계속해서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질' 같이 느껴져서 꺼려질 때가 있다. 커피를 마시는 게 맛과 향을 즐기는 게 아니라 마치 자동차를 굴리려고 바닥난 기름 탱크에 갈색 휘발유를억지로 들이붓는 꼴 같다. 마시고 더 일해라, 노예들아, 이렇게닦달하는 모양새다. 노예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서 좋다고, 힘이 난다고, 맛이 좋다며 커피를 들이켜는 것이다.매일 그런 광경을 견뎌내야 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커피를 더 싫어하게 됐다.
그나저나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 추어탕집엔 돈까스도 팔고, 보신탕집엔 백숙도 팔고, 횟집엔 유부 초밥도 파는 것처럼 커피집에서도 커피 말고 다른 음료를 꼭같이 팔아줘야지 왜 오롯이 커피만 파는 카페가 있는걸까.나는 커피 말고 아이스티를 마셔야 되는데, 아니면 에이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