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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Mar 26. 2020

장국영이 죽었다고

주간(週間) 필름 사진첩 스무 번째

홍콩의 밤과 낮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며
스타페리에서 내리면 보이는 대관람차
몽콕 야시장에서

Rollei XF35

Kodak Coloplus 200

2019년 4월




(제목은 소설가 김경욱의 단편 <장국영이 죽었다고>에서 인용)



 그래도 봄은 온다고, 어느덧 4월이다. 작년 이맘땐 홍콩갔었다. 反중국 시위도 코로나 19 바이러스도 모르고 살던 때였다. 머릿속엔 그저 홍콩 영화와 배우들 생각들로 가득했고 영화 속 장면들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질 수 있어서 내내 꿈속을 걷는 듯 여행을 했다. 이게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4월이면 <봄날은 간다>와 <클래식> 같은 예전 한국 멜로 영화나, 이와이 슌지의 봄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순정 영화들을 다시금 찾아보게 된다. 그래도 역시 4월은 장국영이지. 거짓말처럼 4월 1일 만우절에 세상을 떠났기에 4월은 마치 장국영의 달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홍콩 영화 스타들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장국영 아닐까.


 <아비정전>, <천녀유혼>, <패왕별희>, <춘광사설(해피 투개더)> 등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영화들이 있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그리 유명하지 않은 <백발마녀전>이라는 무협 영화  꼽는다. 작품성으로만 따져 봤을 땐 그저 그런 평범한 B급 무협 영화인데, 장국영의 눈빛, 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된 작품이다. 실은 무협 영화라기보다는 두 남녀의 설렘, 사랑, 믿음, 배신, 이별, 그리고 후회가 켜켜이 쌓여 있는, 다시 말하자면 무협의 탈을 쓴 멜로 영화다.


 무림 정파의 촉망받는 기재인 장국영(탁일항 역)과 일찍이 마교 교주에게 살인병기로 길러진 임청하(연예상 역).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사이에서 우여곡절 끝에 애틋한 한 쌍의 연인이 되어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파와 간의 극한 대립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결국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오해로 인해 연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뒤 속죄하는 마음으로 쓸쓸히 세월을 보내는 장국영. 그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에게 주기 위한 무언가를 혼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장국영은 눈이 흩날리는 산봉우리에서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다. 검 한 자루만 짚은 채 봉두난발에다 다 헤진 겉옷 위에 눈이 수북이 쌓인 모습을 보오랜 세월 동안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황제의 중병을 고치러 설산에서만 피어난다는 영약인 신비의 꽃을 찾으러 온 관병들이 자리에서 비키라며 위협을 한다. 그는 대답 대신 공허한 눈빛으로 무심하게 검을 휘둘러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도대체 황제의 병보다 중한 것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것이냐는 한 관병의 외침에 그가 입을 열어 답한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한 여자다. 난 이곳에서 10년을 기다렸다. 그녀가 그걸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20년에 한 번씩만 피어난다는, 죽은 사람을 살리고 하얗게 샌 머리를 검게 만들어주는, 그 꽃이 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혼자서 쓸쓸히. 자신의 오해로 인해, 심한 배신감과 분노로 일순간 머리가 하얗게 새어 백발마녀가 되어버린 한때 연인이었던 그녀를 위해서. 그녀의 머리칼을 다시금 예전처럼 까맣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다. 떠나간 연인에 대한 남은 사랑인지, 그리움인지, 후회인지, 속죄의 마음인지 모를 온갖 감정이 뒤엉킨 채 회한의 눈빛을 눈물처럼 흘려내는 장국영의 얼굴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오직 이 장면 하나만으로 이 영화를 범작이 아닌 수작으로 기억하게 됐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떠나보낸 연인에 대한 후회와 미안함을 곱씹으며 몸서리쳤을까. 그 장면을 보면 무언가가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영화를 볼 때마다 몇 번이 구간을 반복해서 다시 돌려다. 나도 저런 가슴 시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아니, 저렇게 아픈 사랑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그리고 자연히 지나간 인연들에 대한 가슴 저릿한 기억들도 떠올리게 된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결국 삶을 이루는 건 기억이다. 찰나의 사건, 순간의 선택, 그로 인해 발생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이뤄진 기억의 총체가 '과거의 삶'이고, 그것을 기억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미래의 삶'인 것이다. 만약 그동안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의 삶이, 나라는 존재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일 게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뒤를 돌아보며 옛 기억을 반추하게 되는 거고. 앞으로 아가기 위해서는 그 기억의 취사선택을 통해 일부는 간직하고 일부는 망각하게 될 터이다.


 그런데 나는 예전 기억들을 떠올리면 왜 이리도 후회할 일 투성이인지. 그리 잘못만을 저지르며 살았던 것도 아님에도 지나간 일들, 지나 보낸 인연들에 대해서 떠올리면 후회할 게 너무 많다. 후회할 기억을 만들지 말아야지, 저지르지 않을 수 있는 잘못은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게 참 쉽지 않다. 과거에 붙들려있지 말고 잊을 건 얼른 잊어버리고서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함에도 왜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게 되는지. 치 설산에 홀로 앉아 돌이킬 수 없는 옛 기억의 수렁에 빠져 자책하고 있던 장국영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는 무협도 멜로도 아닌, 다시 말하자면 후회와 기억에 대한 심리 영화라고 하는 게 맞겠다.






 영화에서 임청하 역시 인상 깊은 장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무림의 음모에 휩쓸려서 장국영의 사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철석같이 믿었던 연인 장국영조차도 자신을 오해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마침내 마교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나왔는데, 상대방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자신의 말을 하나도 믿어주지 않는 거다. 사부의 죽음에 분노해서 눈이 뒤집힌 채 다짜고짜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그에게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맹세코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닌데. 원망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분노와 억울함이 폭발하며 일순간에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하고 마는 그녀.


 서릿발처럼 차갑고 독한 백발마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맨 정신이 아닌 상태로 폭주하며 정파의 고수들을 모조리 죽이다가, 결국 장국영의 칼을 맞고서 처연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한다.


 "왜 날 믿지 못하는 거죠?"






 올해 장국영의 기일인 4월 1일에 맞춰 <패왕별희>를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금 그를 떠올리며 극장으로 발걸음을 향해 봐야겠다.



<백발마녀전>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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