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돌 Mar 09. 2020

한석봉은 아니지만 글씨는 예쁘게 쓰고 싶어

주간(週間) 필름 사진첩 열다섯 번째

창덕궁 후원 서편에 위치해서 '원서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네에서 근사한 붓글씨의 간판을 발견했다

Minolta X-700

Minolta-Samsung 50mm f1.4 Lens

Kodak UltraMax 400

2019년 3월



문구점에 갈 때마다 형형색색의 볼펜 코너에 마음을 빼앗긴다

Minolta X-700

Minolta-Samsung 50mm f1.4 Lens

Fujicolor C200

2018년 8월




 사무실에서 비품 신청할 때 늘 부탁하는 게 있다. 과자도 음료도 노트도 포스트잇도 USB도 아닌, 바로  몇 자루다. 아무 볼펜은 아니고 반드시 0.5mm 이하의 가, 그리고 필기감이 부드러운, 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하는 은색 이어야 한다는 나름 디테일한 주문을 한다. 직장인치고는 사무용품 따위 별 관심도 욕심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펜만큼은 좋은 걸 쓰고싶다. 일을 하건 회의를 하건 어차피 노트북 자판두들길 뿐이라서 손으로 직접 펜을 잡을 일은 가뭄에 콩 나듯 드뭄에도 말이다.


 서점이나 문구점에 들를 때도 꼬마아이가 아이스크림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팬시 코너에서 늘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색색깔의 다양한 펜들을 보게 되면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이 펜 저 펜 꺼내서 샘플 메모지에 끄적거려 다. 이름을 써 보기도 하고, 기억는 좋은 문구를 써 보기도, 혹은 아내의 이름을 쓰고 옆에 '바보'라고 적으려다가, 그녀의 매서운 눈길을 느끼고서 황급히 바보를 지우고 그 옆에 나의 이름을 쓴 후 가운데에 '하트(♡)'를 그려보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펜 진열대를 떠나지 못한다.


 대체 언제부터 펜 욕심을 부리게 된 걸까.


 연유를 따져보니 아마 신림동 고시생 시절에 생긴 버릇 아닌 버릇 같다. 좋은 펜을 쓰면, 좋은 글씨로, 좋은 답안지를 써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험은 내용뿐만 아니라 글씨를 잘 쓰는 것도 중요다. 시 2차 시험은 논술형 시험인데 한 과목당 2시간 동안 B4 크기의 시험지 10장을 빽빽하게 손글씨로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장장 5일 간의 시험이 끝나면 손목이 덜덜 떨릴 정도의 중노동이다. 시험 시작 종이 땡 하고 울리면 고사장은 용한 가운데 종이 위에 펜이 스치는 사각사각 소리가득해진다. 다들 어찌나 그렇게나 많이, 그렇게도 빨리 글자를 쓸 수 있는지. 그런 와중에 내 답안지를 돋보이게 하려면, 내용뿐만 아니라 글씨체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당락은 1, 2점이라는 작은 차이로 갈렸으니까.


 그런데 내 글씨는 왜 이 모양일까.


 악필인 고시생들을 위한 <백강 고시체>라는 책으로 절로 손이 갔다. 내 글씨 사춘기 남중생 제멋대로 날뛰는 듯엉망인 악필이라, 마법처럼 명필로 만들어 준다는 그 책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점수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공부건 운동이건 미신이건 뭐라도 해 봐야지. 하지만 나는 결국 백강 선생 같은 명필로 거듭나지 못했고, 물론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시험은 떨어졌고, 그래서 고위 공무원의 꿈은 때려치우고 공기업 회사원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글씨와 펜 덕을 보진 못한 것 같다. 데없이 글씨 연습할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할 걸.


 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고시생 시절이 끝나고 내 안에 남은 공부의 흔적이라곤 그저 펜에 대한 아련 기억과 떨쳐내지 못한 욕심 부스러기뿐인 듯하다.


  종류가 참 많았다. 그 많은 펜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던 펜이 있다. 바로 '제트스트림' 펜. 랫동안 기억 속에 묻혀있던 그 펜이 다시 생각났던 건 작년의 소동 때문이었다. 지난 조국 사태 때 보수 언론이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가 쓰는 펜이 일제인 미쓰비시 제트스트림 제품이라 비난이 있었다. 일본 불매운동이 한창인 시국에 저 보라면서. 저런 인간이 법무부장관이니 검찰 개혁이니 따위를 외쳐서는 안 된다고. 사람을 싫어하면 무얼 하더라도 하나하나 다 밉게 보인다더니 이제는 하다하다 별 시답잖은 펜으로까지 트집을 잡. 하지만 나는 지지자의 입장에서 "아, 조국도 내가  제트스트림을 쓰는구나." 하며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사람은 자신과 닮은 걸 발견하게 되면 묘하게 친근감을 느낀다. 나와 다른 낯설 건 알지 못하는 것이고, 무지한 대상은 더 나아가 무서 대상이 기도 한다. 피부색, 쓰는 언어, 먹는 음식, 입는 옷 등등 어떻게든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걸 찾아내게 되면 동질감을 느끼고서 그제서야 안도하 된다. 런데 기왕이면 내가 조국과 같은 펜을 쓰는 게 아니라 얼굴 똑같이 잘생긴 거였으면 더 좋았을텐데. 굳이 닮을 필요 없는 펜만 닮았네.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더니만. 누군가는 그의 딸의 표창장과 아내의 사모펀드 의혹을, 다른 누군가는 그가 예전에 SNS에서 했던 말들과 배치되는 공정이라는 가치에 대한 의문, 어떤 누군가는 그그저 말만 번지르르한 강남좌파일 뿐이라는 비, 진영 논리 입장에서 누군가는 검찰 개혁을 추진할 최적의 인물로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세상을 바꿔 보겠다던 고시생 시절의 야망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고작 그가 쓰던 펜이나 보고 있다.





 제트스트림뿐만 아니라 고시생계에서 유명한 '스타' 펜들이 있다. 직도 몇 자루는 서재 책상에 올려 둔 필통에 꽂혀있다. 책상에 앉아 오랜만에 펜들을 꺼내면서 반가운 이름들을 되새겨본다. 시험 공부를 때려치운 지도 한참이나 된 지금은 사이가 멀어졌지만 다들 고락을 함께했던 아이들. 참말이지 하루도 떨어지지 못하고 서로 없으면 안 될만큼 죽고 못 사는 사이였는데 이제 서로의 관계가 예전같지 않다.  한때 애정했던 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생뚱맞지만 문득 MB 가카께서 재판장에 앉아 검사석에 앉은 이들을 바라보며 했다던 말이 떠오른다.


 "이거 뭐, 다 아는 사람들이구먼."


 요즘은 어떤 펜들을 쓰는 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말이야, 이 친구들이 고시생 펜 계의 네임드 제품들이었다.


 1. 지브라 사라사 : 제트스트림만큼이나, 아니 제트스트림보다 쓰는 느낌이 더 부드러웠다. 하지만 워낙 부드럽게 미끄러지다 보니 내 악필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게 단점이었다. 쓰다보면 이게 글자인지 그림인지...


 2. 펜텔 에너겔 : 참 좋은 펜이긴 한데, 두껍고 큰 까닭에 내 작은 손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한참 쓰다보니 손목이 아파서 오랫동안 쓸 수가 없었다. 2시간이나 글자를 써야 한다니까.


 3. 파이롯트 하이테크-씨 : 제트스트림보다 더, 내가 가장 좋아했던 펜. 사각사각한 필기감이 끝내줬다. 하지만 비싼 가격 탓에 정작 자주 쓰지는 못했다. 한 자루에 거의 4천원 가까이 했던 것 같다. 지금은 가격이 더 올랐으려나.  


 4. 모닝글로리 마하펜 : 일제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유일한 국산 펜. 그러고보니 펜 때문에 손도 일제, 한창 왕성할  일본산 영상물..봤으니 아랫도리도 일제. 우리 때의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친일파였으리라 짐작해본다. (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친일파가 아닌 친미파의 길을 택했던 친구나, 혹은 한쪽에 국한되지 않은 다극주의 노선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88 올림픽을 모르는 세대, 그리고 꼰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