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하숙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와서 반겨주는 이 없는 빈 방 문을 열었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다.
아무도 없는 좁은 방엔 컴컴한 어둠만이 가득할 줄 알았는데 저어기 구석 어디선가 자그마한 불빛이 반짝거린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아놓은 전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미약하기 짝이 없는 밝음이지만 조금씩 방 안의 어둠을 몰아내면서 방도 마음도 따뜻하게 녹여 주는 것 같다. 들릴 듯 말 듯 조그마한 소리로 캐럴도 흘러나온다. 올 아이 원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 머라이어 캐리의 목소리다. 트리와 캐럴과 함께하니, 혼자이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느낌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라면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얽힌 혼자만의 추억을 아내에게 얘기했다.
"나 혼자 살 때, 외로워서 방 안에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도 켜놓고 캐럴도 틀어놓고 나갔었다. 그렇게 해 두니까 밤에 집에돌아오면 왠지 사람 사는 집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정말이지 그해 겨울은 너무나도 쓸쓸했다. 객지에서 대학 생활을 한 지 몇 년째. 그땐 여자친구도 아직 없었고, 친구들은 군대에 있거나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만날 일도 없고, 지갑은 돈도 한 푼 없어 홀쭉하고 , 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엔 알바를 하고, 그렇게 하루 내내 혼자서만 지내는 날이 이어졌다. 밥 먹을 때 빼곤 하루종일 입 한 번 열지 않은 날도 있었다. '입에 거미줄을 친다'라는 표현 그대로인 삶.켜켜이 쌓여가는 외로움의 두께를 어떻게든 씻어내야 했다.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아내는 내 말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혼자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 서울이 얼마나 외로운 도시인지 원래 서울에 살던 서울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그 해 겨울, 하숙방 구석에다 조그마한 트리를 하나 세웠다. 혼자서 방에 들어오면 나를 맞이하는 우울한 어둠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서, 빈 방에 덩그러니 서 있는 트리의 전구를 켜놓고, 오디오에는 캐럴 CD를 반복 플레이해 둔 채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면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따뜻한 불빛과 음악이 나를 반겨주는 거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하는 기분이 들었다. 보이진 않지만 누군가에게 위로받는 느낌.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밤엔 편히 푹 쉬렴. 나에게 속삭여주는 메리 크리스마스.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별짓을 다 했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다 뭔 짓을 한 거람. 전기료도 많이 나왔을 텐데, 월세에 전기료 포함이라고 너무 막 써댔구나.
아내와 둘이서 함께 살고 있는 지금은 그럴 일이 없다. 처음으로 우리집에서 우리끼리 맞는 크리스마스날. 분위기를 내 보기로 했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를 한참 돌아다닌 끝에 적당한 크기의 트리를 하나 골라왔다. 부엌 쪽에 트리를 세우고 콘센트에 전선을 연결했다. 하나 둘 셋, 반짝. 밤새 속삭이듯이 반짝거리는 트리 불빛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다음 해엔 좀 더 욕심을 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커다란 트리를 한 번 세워보자. 어깨엔 커다란 조립형 본체를, 양 손엔 장식물들을 한아름이나 사 들고 와서 몇 시간 동안이나 낑낑대며 트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 둘 셋, 반짝. 이번 트리는 귓속에다 속삭이는 게 아니라 마치 하드록 밴드의 음악 같다. 불빛이 막 번쩍번쩍하는 게마치 콘서트장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크리스마스엔 혼자 있는 것보단 사람이건 물건이건 뭐건 함께하는 게 더 좋다.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건 캔디나 할 짓이지 나하고는 영 안 맞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잘 부탁한다, 트리야. 이번 겨울은 둘이 아니라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셋이서 함께 맞이할 예정인데처음으로 겪어보는 낯선 경험이겠다.그리고 더 이상 외롭지도 않을테고.인생이란 결국 혼자라고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삶에 아직까지는 한 표를 던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