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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Feb 26. 2020

나는 평생 살이 안 찔 줄 알았지

주간(週間) 필름 사진첩 열두 번째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아내와 함께했던 다이어트 식단 (샐러드, 삶은 계란, 구운 버섯, 블루베리)

Canon QL17 g3

Canon 40mm 1:1.7 lens

Fujicolor C200

2019년 7월




하지만 다이어트 식단 이전에는... 자극적인 음식과 맥주로 배를 가득 채웠던 지난날 (제주 어딘가의 맛집에서)

Minolta X-700

50mm f1.4 Minolta-Samsung lens

Fujicolor C200                                       

2019년 5월




 "이제 그만 씹고 좀 넘겨라. 제발."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이다. 아들 녀석이 소도 아니면서 밥 한 숟갈 입에 넣고 삼키지도 않은 채 한참을 씹기만 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셨지. 나는 어지간히도 밥 먹는 걸 싫어하는 아이였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행위가 무척 번거롭고 귀찮았다. 대체 왜 하루에 세 번이나 이런 짓을 반복해야 하는 거지. 평생 동안 매일같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하던 식사 대용 알약이 하루빨리 출시됐으면 하고, 마치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처럼 진심 어린 기도를 한 적도 있다. 한 알 꿀꺽 삼키기만 하면 하루 종일 배가 고프지 않아서 밥 따위는 안 먹어도 되는 구원의 그날이 오기를. 또래 친구들은 늘 "배가 고프다"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나는 그런 느낌이라는 걸 도무지 모르고 살았더랬다.


 그런 아이였으니 식사 시간이 얼마나 고역이었겠는가. 먹기도 싫고 맛도 없는데 어떡해요. 밥 먹는 시간이 제일 싫어요. 밥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면 오물오물 씹어대기만 하지 기어코 삼키지를 못다. 위장은 끝모를 기다림을 견뎌야 했을 게다. 숟가락을 떠난 밥알이 함흥차사도 아니고 어째 기별이 없는 게야. 기다리는 위장 쪽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밥을 왼쪽으로 씹다가 오른쪽으로 씹다가, 세월아 네월아 되새김질하는 동안 심심할라치면 씹는 횟수를 속으로 세어 보기도 하고, 정 안되면 물을 들이부어서 억지로 후루룩 삼켜버려 결론을 내려. 이러니 밥공기의 밥이 줄어들려면 하 세월이. 남들은 진즉에 식사를 끝내고 이제 상을 물려야 하는데 내 밥그릇은 아직도 한참이곤 했다.


 이 즈음 되면 슬슬 엄마의 눈치를 보게 된다. 밥 안 먹고 여태 뭐했냐며 야단맞을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나름 해결책을 강구했다.


 첫번째는 나에게 가까운 쪽의 밥그릇에서부터 밥을 뜨는 거였다. 반대편에서 내 밥그릇을 쳐다보면 밥이 점점 비워지는 것처럼 보이게. 실은 맞은편 사람에겐 사각지대라 할 수 있는 나의 반대편 밥그릇 벽 쪽으로 밥을 밀어붙이는 게 핵심이다. 마치 북괴가 남침용 땅굴을 파듯 조심스럽게 작업을 진행했건만 결국 엄마한테 걸려 등짝을 얻어맞 전략 수정이 불가피했다. 두번째 방법은 엄마가 국을 뜨러 가시는 순간의 치안 공백 상황을 놓치지 않고 밥그릇에서 몰래 한 숟갈 두 숟갈씩 퍼서 아빠나 동생밥그릇에 얹는 거였다. 이렇게 좋은 건 가족과 함께 나눠먹어야죠. 하지만 밥상에서의 소동을 참지 못했던 동생의 고자질 때문에 이 방법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세번째로는 국그릇에 밥을 풀어버리는 거였다. 오늘은 뜨끈한 에 밥을 훌훌 말아먹을 거라며 한껏 오버스러운 액션을 취하면서. 국그릇 아래쪽에 가라앉은 밥알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연히도 설거지 때 밥 반 국 반의 그릇이 발각되었고 이 방법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나름대로의 기기묘묘한 방법으로 밥을 남기기 위한 고군분투를 벌였다.


 그렇게나 먹는 걸 싫어하는 나였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살이 오른 몸을 바라보며 이게 정말 현실인가, 하고 인식의 혼란에 빠지고야 만다. 이게 정녕 내 몸이란 말인가. 샤워를 하고서 거울에 비친 벗은 몸을 바라보고 있자면, 식빵에 누텔라 잼을 듬뿍 퍼서 바르는 듯,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살이라는 걸 내 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퍼바른 것 같다. 살이 이렇게나 찌다니. 먹는 걸, 특히 맛있는 안주와 에일 맥주를, 이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이 되다니. 매년 봄만 되면 작년에 입었던 바지들의 허리둘레가 맞지 않아서 옷가게를 가야 한다니. 바지야, 우리 한때는 좋았잖아, 이제 와서 나한테 대체 왜 그러는 건데. 건강검진 때 인바디 측정을 하면 눈치 없이 죽죽 치솟는 체지방과 내장지방 따위의 그래프를 마음 졸이면서 보게 되다니.


 '마른 사람'으로 일생을 보내왔던 그동안의 삶의 궤도를 어디서부터 이탈해서 '요 모양 요 꼴'인 세계로 불시착하게 된 걸까. 마른 몸이 좋은 몸이라는 건 그저 미디어에서 세뇌시킨 환상이그걸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대중의 편견일 뿐이라고 되뇌어보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좀 아니다 싶다. 살이 다는 걸 난생처음 경험해서일까. 아무래도 낯설고 두렵다.


 시 예전의 몸으로 돌아가고자 평생 나와는 연이 닿지 않을 것 같았던 '다이어트'라는 걸 시작하게 됐다. 서른 중반을 지나고 있으니 이제 건강을 챙길 나이가 되긴 했다. 일단 먹는 것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운동도 매일같이 열심히 하고.  ㅡ라고 다짐했건만, 그게 벌써 작년 여름의 결심이다. 살을 빼겠다며 아내와 함께 저녁마다 밥 대신 샐러드를 먹었지만 금방 질려서 그만두기도 했다. 고작 더운 계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이다. 커다란 욕심에 비해 가냘픈 의지를 지닌 우리들이. 나도 아내도, 분명 백일간 쑥과 마늘만 먹었다던 곰의 후손일텐데 왜 이런걸까. 그래서인지 덧없게도 아직 살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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