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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Apr 04. 2020

잠수교 기둥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다

주간(週間) 필름 사진첩 스물네 번째

반포대교, 그리고 잠수교

Canon QL17 g3

Canon 40mm 1:1.7 lens

Fujicolor C200

2019년 6월




 한강 반포대교 아래 잠수교의 북단에서 남단까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걷는 걸 좋아한다. 아내는 유부녀가 되기 전, 아직 여자친구이던 무렵 반포대교 북단 용산구 보광동에 살았다. 연예인들이 많이 사는 한남동, 그 옆에 자리 잡은 보광동이라는 이름의 작고 정겨운 동네. 곳에서 걸어서 5분이면 잠수교까지 갈 수 있었다. 데이트를 하 늦은 밤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잠수교를 참 많이도 오갔다. 아무 말 없이 둘이서 한참 동안 걷기도 하고, 열대야의 밤에는 다리의 분수쇼를 보며 시원한 맥주를 짠 하고 들이키고, 추울 땐 서로의 손을 호호 불어주며 꼬옥 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그리고 아쉬운 작별을 하고 홀로 740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 항상 지나가던 곳.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함께 웃고 울고 안고 싸우고 화해하며 한강물에 흘려보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잠수교 기둥에는 번호가 매겨져 있다. 북단의 용산에서 남단의 강남 쪽 방향으로 1부터 48까지의 숫자가 순서대로 하나씩 기둥에 커다랗게 붙어 있다. 내 기억으론 48번까진데 갑작스러운 지각 변동으로 인해 한강 폭이 더 넓어져서 다리를 확장해야 하는 날이 오지 않는 이상 49번 이후의 번호는 앞으로도  수 없다. 밤에 잠수교에서 이걸 하나씩 세면서 걷다 보면 반포 쪽 한강공원변에 둥둥 떠 있는 세빛섬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나타난다. 여기가 바로 강남의 입구입니다, 라며 는 듯 거만불빛을 반짝거리면서. 그곳으로 걸어가는 길에 마침 우리 나이와 똑같은 숫자가 새겨져 있는 기둥을 마주치게 되면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엔 저쪽 기둥 숫자가 우리 나이였는데 올해는 이쪽 기둥으로 옮겨왔네. 시간 정말 빨리 흐른다. 그치?"


 스물다섯에 만났으니까 25번 기둥부터 우리 만남은 시작된 셈이다. 연애를 시작하던 해 여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던 잠수교를 걸으면서 기둥의 번호를 처음으로 발견하게 됐다. 여기 번호가 매겨져 있네. 어라, 정말이네. 그동안 나도 몰랐었어. 그동안 이미 존재하는 대륙이었음에도 콜럼버스가 뒤늦게 신대륙 발견이라 명명한 것처럼, 우리도 이제야 찾아낸 기둥들을 차례로 정복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발견한 기둥들의 저 끝에는 몇 번까지 있는지 걸어가 보자. 그렇게 걷 중 그때의 우리 나이와 같은 숫자의 기둥을 발견했다. 그 옆에 서서 '우리 매년 함께 나이 들자, 번호에 맞춰 하나 둘 셋 기둥 옆을 같이 걸으면서 오래도록 함께하자'라고 일견 섣부른 다짐을 했다. 우리는 왜 좀 더 이른 숫자의 나이일 때 만나지 못했을까, 토록 서로 좋아하니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1도 10도 20도 아니라 한참 늦은 25부터 인연을 시작했지만 적어도 100번까지는 영원토록 함께하자는 간질거리는 사랑의 언약도 덧붙였다. 그러니까 마치 유비 관우 장비처럼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한날한시에 가자던 그런 맹세와 비무리한 거였다. 그렇게 철없이 마냥 달콤하기만 했던 나날들이었다.


 20대 후반에는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와 장만옥이 이별 연습을 하던 것처럼 우리도 감히 그런 짓을 따라 해 봤다. 아, 물론 여자 친구가 내 품에 안겨서 장만옥처럼 흐느끼지는 않았다. 이건 능이나 대기업 인적성검사 같은 지한 시험이라기보다 그저 간단한 예습 같은 거였으니까. 우리 만약에 헤어지더라도 서른 살이 되기 전 29번과 30번의 기둥 사이 어딘가에서 한 번은 다시 만나자고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서른이 뭐 대단한 숫자라고. 그러니까 스물아홉과 서른의 절반인 6월의 마지막 날, 그날 저녁에 잠수교에서 다시 만나. 그리고 어색한 재회의 입맞춤을 하자는 내용의 지키지도 못할 손발이 오글거리는 약속을 서로의 마음속에 새겼었다. 연애할 때 우린 무히도 다퉜었는데 그래서 오래가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헤어질 때를 준비했던 거였을까. 시나, 오게 될지도 모를 그 순간을 대비하 했다. 그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티격태격하면서도 계속해서 잘 만났고 마침내 결혼에까지 이르렀으니 그건 쓸데없는 기우였다.


 31번 기둥과 같은 나이였을 땐 어느 날 새벽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잠수교를 홀로 걸어 본 적 있다. 새벽 서너 시 무렵이라 주변엔 인적 하나 없이 바람소리만 스산하게 울리던 눈 덮인 다리에서 오롯이 나 홀로. 버스도 전철도 끊긴 늦은 시각. 나이 서른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던 어느 싯구절을 떠올리며 고요한 적막 속으로 침잠했다.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고민되기도 두렵기도 했다. 한참 걷다 보니 문득 친구 W가 생각났다. '나는 빨리 서른이 되고 싶어'라며 아직 한참이나 남은 그날을 스무 살 때부터 고대하던 친구. 또래 남자들은 어리게 여기고 노년의 교수와 마음을 나누던, 마치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같던 친구였다. 서른을 넘긴 때가 오면 지금의 모든 혼란과 괴로움이 정리되어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바라더니, 너는 지금그렇게 바라던 삶을 살고 있을까. 혹은 '서른은 너무 이르고 마흔이 되어서야 인생의 파도가 그치겠거니' 하며 그날을 한 번 더 유예하진 않았을까.     


 오늘은 어느덧 30번대 중반의 기둥 곁을 지나가고 있다. 마음만은 아직도 20번대 반 어딘가의 기둥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내일모레면 마흔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그동안 걸어왔던 숫자들의 기둥을 뒤돌아보니 우리가 이렇게나 시간을 함께했나 싶다. 이곳에 서서 우리의 시작을 함께했던 25번 기둥을 바라보 아득히 멀어 보이기만 하다. 저렇게나 먼 곳에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남은 기둥이 지나 온 기둥의 개수보다 적게 남아있다. 잠수교를 걸을 때마다 숫자를 세던 놀이가 이제는 왠지 달갑지 않게 느껴진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을 애써 붙잡아 두고 싶어서, 혹은 굳이 시간의 흐름을 명확하게 깨닫고 싶지 않아서 아내에게 괜히 이렇게 말해본다.


 "우리 이제, 잠수교 기둥 번호 세는 거 하지 말까?"


 결국 잠수교의 마지막 기둥 48번이 끝나고 나면.


 우리의 풋풋하고 감성적이었던 청춘의 나날들도 마침내 종언을 고하고야 말 것 같아서 벌써부터 아쉬움이 피어오른다. 번호도 붙어있지 않은 미지의 49번 이후의 숫자들을 살고 있을 땐 어떤 모습이려나. 아직 머릿속에 그때의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아마도  거야, 하 흐릿한 실루엣만 그려 볼 뿐. 뉴 노멀과 코로나 팬데믹의 시대를 거치면서 당장 다음 해의 삶이 어떨 지도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동안의 삶은 늘 상상 이상 혹은 상상 이하였으니까. 2020년이면 원더키디와 우주여행을 할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역병이 창궐하고, 타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며, 약자들은 기댈 곳 하나 없는 데다가, 아직까지도 인종차별이 횡행하는 세상일 줄은 상상이나 했겠나.


 그리고 봄에 태어날 우리 아이와 함께 훗날 1번 기둥부터 잠수교를 다시 걸어봐야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차례대로. 아마도 그건 새로운 출발처럼 느껴 게다. 내 유전자를 세상에 남긴다는 건 똑같은 삶을 복제하는 동어반복 지루한 행위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새로운 날들의 시작 레며 켜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것 같. 이가 생기기 전, 그러니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이를 낳아야만 하냐는 문에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하나 정도는 이유가 생긴 듯하다. 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왠지 지금보다는, 지난번보다는 더 잘할 수 있을 라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핏줄을 이어가는  아니겠냐. 이번에는 저번보다 더 나을 거야, 라는 낙관적인 기대. 마도 이런 방식으로 우리 부모님도 부모님의 부모님도, 그렇게 모든 인류 계속해서 대를 이어 발전해 왔으리라. 


 하튼 이제 잠수교 걷기를 다시 시작해보자. 번호 붙여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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