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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un 24. 2020

한동안 핑클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즐겨가는 카페 '롯지190'의 창에 그려져 있는 사색하는 인물. 왠지 내 눈에는 따돌림 당해 혼자서 괴로워하는 아이처럼 보였다


힘든 날이 지나가고 나면 언젠가는 햇빛 쨍한 봄날이 오겠지

Samsung af slim zoom 70s

Samsung zoom 35-70mm auto macro lens

Kodak colorplus 200 film

2020년 4월




어딜 가면 볼 수 있는지
알고 있어도 나 갈 수 없는 건
아마 몰라보게 수척해진 내 모습 보고
놀란 가슴으로 걱정할까 봐
날 두고 떠나갈 때 마지막 내게 했던
그대 기억으로 울지 말라는 약속 지킬 수 없을까 봐
니 맘에 없던 그 모진 말도 조금도 그댈 지울 수 없는 걸
난 알고 있어 언제나 그대 내 곁에와 잠드는 걸

- Blue Rain, 핑클, 1998



 중학생 남자아이 세 명이 무대에 올랐다. 우리 반 반장, 이름기억나지 않는 얼굴 하얀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 그들은 곧이어 흘러나오는 음악에 흐느적흐느적 춤 같잖은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떠오르던 신예 걸그룹이었던 핑클의 '블루 레인'이라는 곡이었다. 어머니의 치맛바람 덕분에 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의 반장은 센터 자리에서 박자보다 앞서 신나게, 얼굴 하얀 친구는 누군가의 앞에 나선다는 게 난생처음이라 쭈뼛거리면서 박자보다 느리게, "그대 기억으로-"부터 시작하는 옥주현의 고음 파트를 맡았건만 때마침 변성기가 와 버린 탓에 한 옥타브나 낮은 저음으로 웅얼거리던 나까지.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엉망진창의 실패한 무대가 확실했다. 전교생들은 대체 저건 뭐야, 하는 눈빛으로 한참을 쳐다보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마지못해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무대에 서게 된 걸까.


 얼굴 하얀 친구는 반에서 따돌림당하던 아이였다. 당연히도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몸집이 작아서 교실 맨 앞줄에 앉았던, 특별히 잘나거나 딱히 못나거나 한 부분이 없어서 얼굴이 잘 기억나지도 않는, 어느 교실을 가더라도 한두 명쯤은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맨 뒷줄에 앉는 키가 큰 녀석 하나가 그 친구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마치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사나웠는데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주먹부터 나가는 놈이었다.


 "왜 그래, 때리지 마. 하지 마."


 "하쥐뫄아아~? XX하네 이 새X가. 너는 X나 맞아야 돼!"


 그놈은 그 친구를 쉬는 시간마다 때렸다. 어쩌다가 쉬는 시간에 그놈이 잠을 자거나 매점에 가거나 할 때를 빼곤 늘. 때리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해가 뜨면 낮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되는 것처럼, 어느덧 때리고 맞는 건 당연한 일처럼 되어갔다. 처음에는 그 친구도 아프다고 소릴 지르고 때리지 말라고 쳤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돌아오는 건 더 매서워진 주먹과 발길질뿐. 도적인 폭력 앞에서 저항의 반복된 실패는 사람을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지, 나중에는 결국 체념한 얼굴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맞곤 했다.


 "아악! 악. 아.. 아아... 으으으."


 얼굴 하얀 친구의 신음소리는 매번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교실 온도는 봄에도 여름에도, 마치 한겨울 때처럼 차가워졌.


 정작 무섭게 느껴졌던 건 처 입은 수 같던 그놈이 아니었다. 같은 반 친구가 이유 없이 맞고 있는데 눈길조차 주지 않던 대다수의 아이들이었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침묵하던 방관자들 중의 하나였고. 자칫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맞는 사람이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도감, 혹은 힘없고 조그마한 존재는 저렇게 당해도 싸다는 잔인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친구가 맞으면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는 수십 명 아이들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


 그 친구와 친하거나 친해 보이기라도 하면 나도 그놈한테 같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움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부터 얼굴 하얀 친구 곁엔 아무도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그 친구는 소위 '왕따'가 되고 말았다. 또다시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 역시 그랬다. 집에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라 하루는 그 친구와 같이 걷게 됐는데 하굣길에도 그놈이 다가와서 쉬는 시간에 모자랐던 걸 채우기라도 하듯 또 때리는 것 아닌가. 엉거주춤 말리다 보니 어쩌다가 나도 얼굴을 두어 대 얻어맞았고, 그날 이후로 그 친구와 멀찌감치 떨어져서 걷게 됐다. 괜히 나까지 얽혀서 맞기 싫었다. 그나마 반장은 기 역할을 다 하려고 했다. 아니, 하는 척을 했다. 그놈이 그 친구를 때릴 때마다 적당히 말리는 척하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마치 할 일 다 했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쇼맨쉽은 시장에서 떡볶이와 오뎅 먹는 사진을 찍던 정치인의 모습 같았다. 그렇게 그 친구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지내게 됐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그 친구와 비슷하게 맨 앞줄 혹은 두 번째 줄에 앉던 작고 조용한 아이였는데 왜 그놈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반에서 1, 2등을 다툴 만큼 공부를 잘해서 함부로 못했던 건가 싶다. 그 친구는 중학생임에도 얼굴이 아기 피부처럼 하얫고 소심했으며, 아직도 초등학생처럼 코를 찔찔거서 코와 입 사이가 늘 허옇게 터 있었다.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집안 형편도 어렵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게 맞아야 할 이유가 될 순 없다. 훗날에야 들었는데 때리던 그놈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단둘이 힘들게 자랐다고 했다. 물론 그게 때리는 데 이유가 될 순 없. 왜 불행한 처지의 아이들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의 불행한 아이들능적으로 알아차려서 기어코 괴롭히고야 마는 걸까. 신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걸 참지 못해서일까.


 그러던 중 매년 가야 하는 수련회 날이 다가왔다. 반장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각 반마다 한 팀씩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너는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몇 안 되는 재원이니까 고음 파트가 있는 여자 노래가 가능해, 라는 말로 나를 꼬드겼다. 그리고 왕따였던 얼굴 하얀 친구도 무대에 같이 세우자고 했다.


 "도대체 쟤를 왜?"


 "재밌잖아."


 재밌을 거라 말하며 씨익 웃는 반장의 얼굴을 보며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 물론 나름의 선의에서였을지도 모른다. 따돌림당하던 친구를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무대에 세워 자신감을 북돋아주고 싶어서라고. 그래서 왕따를 벗어나게 해 주고파서였을까. 그렇지 않고 만약 악의에서였다면 가뜩이나 힘들어하는 친구를 더욱더 조롱거리로 만들려던 악마 같은 계획이었까. 겉으로는 도와주는 척 해도 속으로는 같이 괴롭히고 싶은 마음에서. 아직까지도 반장의 진심을 모르겠다. 그리 친하지 않아 연락이 끊긴 지도 한참이 됐으니 이제 와서 그때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도 없 노릇이다.


 그렇게 어색한 구성으로 급조된 팀은 함께 모여 며칠의 연습을 했. 핑클의 '블루 레인'을 몇 날 며칠이고 연습했는데 그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평소에 서로 말 마디 섞지 않던 아이들이 모여서 뭘 할 수 있었겠나, 결국 야유 속에 새드 엔딩으로 무대의 막을 내릴 수밖에. 그날 그 엉망이었던 무대 이후로 나는 핑클이라는 그룹의 노래는 일절 듣지 않기로 했다. 핑클 노래만 들으면 그때 그 무대가 떠올라서였다. 다행히도 '블루 레인'이 그리 인기가 없었기에 끔찍한 기억 역시 쉬이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후속곡인 '내 남자 친구에게'가 엄청나게 히트했고 이후로도 핑클은 승승장구하더니 마침내 톱스타의 자리에 올라 버렸다. 중학생 시절 내내 어딜 가나 핑클 노래가 들리는데 그것 참 고역이었다. 노래뿐만이랴. 심지어 매점에는 핑클 멤버 스티커가 들어있는 핑클빵까지 팔아댔다. 그러울 정도로 주변엔 핑클 투성이였다.


 최근의 뉴트로 유행이 언제까지 가나 싶었는데 급기야는 언제 적 이효리와 비마저 전성기의 모습 그대로 현실로 다시 소환됐다. 그런데 TV에서 이효리를 볼 때마다 그녀가 속해있던 그룹핑클 생각이 나고 핑클을 떠올리면 그때 그 기억의 편린채 무뎌지지 않은 날 선 모서리로 마음을 할퀴어댄다. 한동안 핑클 노래를 듣지 않았었는데 또다시 자주 들려오기 시작한다. 여전히 이효리는 저렇게나 밝은 얼굴로 웃고 이야기하고 춤추고 노래하는데, 얼굴 하얀 그 친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때의 상처는 아물었을까, 학은 갔을까, 직장은 다닐까, 결혼은 했을까, 아이는 있을까, 그리고 실패한 무대의 기억은 잊고서 노래하는 걸 좋아하게 됐을. 아직도 예전의 슬픔과 싸우고 있지는 않았으면 바란다. 이제사 그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것도 퍽 부끄러운 일이. 내가 뭐라고, 감히 "잘 살고 있을 거야." 같은 빈말 따위는 하지 못하겠다.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땐 참 미안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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