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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Nov 12. 2020

빨리 죽기 싫으면 운동 좀 해


(이런 것도 필름 사진인가 싶지만...) S병원 영상 검사 사진

2015년 10월 / 2020년 10월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매년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받는다. 스물일곱에 회사원이 되었으니 벌써 열 번째 검진이다. 이번에는 늘 하던 검사에서 하나 더 추가, '대장 내시경'을 받아 보기로 했다. 위 내시경 검사는 늘 받었는데 대장은 올해가 처음이었다. 보통 마흔 이후부터 받는 검사여서 아직 일러 보지만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작년에 직장동료 한 명이 만으로 마흔이 되자마자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갑작스러운 대장암 진단을 받고 투병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소식을 전해 듣기로는 다행히도 치료는 됐단다. 다만 대장의 삼분지 일 가량을 잘라 냈으며 이로 인해 앞으로 화장실에 가는 빈도가 늘어날 거라고 했다. 삼십 대 후반의 내 또래 직원들은 이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혹시 나도...?'라는 불안감 퍼져나갔다. 불안이라는 고약한 감정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염됐고 마음속 깊숙이 스며들어 모두 걱정에 떨게 만들었다.


 대장을 검사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아니, 어차피 수면 내시경이라 검사 중엔 잠들어 있기만 하면 되니 어렵 않다. 검사 하루 전의 지난한 '준비 과정'이 힘들었다. 사람을 어찌나 지치게 하던지. 마시기 좋게 레몬향을 첨가했다지만 그럼에도 역한 내음을 풍기던 레디프리산이라는 관장약을 2리터나 삼켜야 했다. 약뿐만 아니라 생수도 2리터 가까이 마셔야만 했고. 고생스럽게 약을 먹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아랫배에서는 신호가 왔다. 허겁지겁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앉으니 폭풍처럼 변이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는데 열몇 번까지 세고서는 더 이상 횟수 셈을 포기했다. 이 정도면 나올 만큼 다 나왔겠지, 싶었는데도 가련한 괄약근은 새벽녘까지 열렸다 닫혔다 힘없이 반복했다. 어찌나 싸 제꼈는지 나중에는 뒷문에서 아무런 건더기(...)도 없는 맑은 물만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전날 밤새 고생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다행히도 나의  대장은 깨끗했다. 사실 위에는 약한 표재성 위염이 있다고 했지만 이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갖고 있는 흔하디 흔한, 질병 같지도 않은 질병이라했다. 과음하고 토하는 것만 몇 번 해도 위염이라는 소견이 나온다고. 하지만 다른 부위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들이 도착해 있었다. 초음파 검사 결과, 담낭에는 제법 많은 용종이 돋아나 있다고 했다. 어쩌면 몇 년 뒤엔 절제를 하고 나서 쓸개 빠진 인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작년에는 없었던 지방간 진단받았고, 치솟은 체지방률이라는 달갑지 않은  덤으로 딸려왔다. 게다가 나를 더욱더 심각하게 만든 건 폐에 결절이 있으니 지금 바로 병원 검사를 받아 보라는 소견 한 줄이었다. "흉부 영상 검사상 우측 폐에서 폐경화 및 간유리음영을 동반한 소견이 관찰됩니다."라는 다소 무서운 내용이었다.


 '이거 혹시...?'라는 마음에 아내에게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나...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도 아파트는 그냥 둬. 보험금 받아서 대출 갚다가, 몇 년 지나서 양도세 안 내도 될 때, 집값 좀 더 오르고 나면 그때 팔아. 나 없으면 그 돈으로 먹고살아야지? 그리고 진이하고 같이 처갓댁으로 들어가."


 "뭐래. 헛소리 말고 건강하게 회사 다니면서 매달 대출금 갚을 월급이나 벌어 와!"


 아내는 쓸 데 없는 소리 말라며 등짝을 짝 하고 때렸다.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를 건넸다. 몇 년 전에 완치된 폐결핵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라고, 매년 건강검진을 받아 왔는데 올해 갑자기 큰 병이 생겼을 리 있겠냐면서.


 나는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도 아니면서 예전에는 죽고 사는 것에 그리 걱정이 없었다. 혹여나 내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 아내는 무척 슬퍼하겠지만 처갓댁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고, 부모님은 먼저 떠나보낸 자식 때문에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건강하신 분들이니 금방 회복하실 테고,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은 "그 친구,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라며 술 한 잔 기울여 주긴 하겠지. 공수래공수거다. 나 하나 없더라도 세상은 별 일 없다는 듯 잘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게 되니 덜컥 근심이 생겨났다. 이제 고작 6개월 먹은 아들을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 순 없.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진 내가 건강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면 손수 보살펴야 할 아이라는 존재를 낳는다는 건 불필요한 근심의 싹을 하나 더 틔우는 것 같다. 책임질 무언가가 있다는 건, 삶을 열심히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어떨 땐 보이지 않는 줄속박되는 듯한 부담이 되기도 한다.


 혹시나 죽을지도 모를 큰 병일까 싶 걱정으로 콩닥거리 가슴을 부여잡고, 5년 전에 입원해서 결핵 치료를 받았던 S대병원에 외래 진료를 예약하고 찾아갔다. 퇴원하면서 다신 여기 안 와야지, 해 놓고선 또다시 찾아왔다. 검진기관에서 찍은 X-레이며 CT 사진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 가서 영상과에 제출하고 왔다. 긴장한 채 호흡기내과 진료실 앞에 앉아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왔다. 간만에 뵙는 주치의 선생님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정말로요, 하하호호 같은 의례적인 안부를 묻고 답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료를 청한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5년 전에 여기서 결핵 완치 판정을 받고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요. 올해 폐 사진 판독 결과가 안 좋게 나와서요. 바로 상급병원에 가 보라는 소견이 나왔더라구요."


 "어디 보자. 음... 5년 전하고 사진 결과가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뭐하러 왔어요?"


 선생님은 별 이상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진상으로는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고. 우측 폐는 결핵을 앓은 흔적이 계속해서 남아있고 때문에 좌측과는 달리 일부가 소실된 것처럼 보이는 거라는 말씀이 이어졌다. 내가 하도 걱정된 나머지 폐암 환우들의 인터넷 카페인 '숨사랑'이라는 곳 게시글들까지 검색해 가면서 걱정했다 하니 어이없다는 듯 웃기도 하시고,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정성스레 설명 하, 내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예전과 지금의 비교 사진까지 직접 찍어주셨다. 전히 다정하신 분이었다.


 "그래도 그때 이후로 숨이 계속 답답한 느낌이 있는데 혹시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요?"


 괜찮다는 말에도 여전히 의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가짜 환자는 계속해서 걱정을 털어놓았다.


 "그게 폐만의 문제일까요. 평소에 운동은 좀 해요?"


 선생님은 역시나 걱정할 거 없으니까 평소에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는 진단을 리셨다. 그렇게 5년 만의 진료는 끝이 났다. 별 것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나는 늦이 의대생인 동생에게 톡을 보냈다. 사람이 이렇게 의심이 많다. 내 폐 사진 좀 봐, 이거 괜찮은 거야? 동생도 선생님과 똑같은 답을 보내왔다.


 "별 것도 아닌 걸로 쓸 데 없는 걱정 말고 운동이나 좀 하소."


 의사 둘한테서 똑같은 대답을 들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었다. 아직까진 살 날이 많이 남아있음에 감사했으며 동시에 몸에 무심했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병원에 다녀온 다음 날부터는 운동 삼아 사무실에 올라갈 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 이렇게라도 평소에 운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실행에 옮긴 . 그런데 사무실이 있는 17층까지 가는데 도중에 쓰러질 뻔했다. 철천지원수 아니면서 왜 운동과는 그토록 담을 쌓고 살아온 건지. 결국 첫째 날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10층에서 포기하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다음날엔 13층까지, 그다음 날부터는 드디어 17층까지 쉬지 않고 걸어 올라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몸을 놀리자 비루한 허벅지는 터질 것 같고 굶주린 짐승처럼 숨을 가삐 몰아쉬 머리가 빙빙 돌았다. 며칠이 지나자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일이든 육아든 운동이든, 하다 보면 뭐든지 간에 조금씩은 늘기 마련이다.


 그나저나 일찍부터 매일같이 계단으로만 오르내린 Y 차장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겉으로는 뼈와 거죽만 남아 비실거리는 아저씨처럼 보이는데, 역시 아이를 네 명이나 낳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비단 Y뿐이랴. 저마다의 방법으로 몸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점심시간에 주변 산책로를 걷는다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거나, 회사 앞 피트니스 센터에서 PT를 받는다거나, 심지어 업무 시간 중 틈틈이 야외 휴게실에서 줄넘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동료들을 보며 '일은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 몸은 엄청나게들 챙기네.'라며 혀를 쯧쯧 찼을 텐데 이제는 달리 보인다. 다들 무언가 지켜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몸을 관리하는 모습 같다. 나는 가장이다, 내가 쓰러지면 안 된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 라는 비장한 결기 비슷한 게 슬몃 느껴졌다.


 나도 건강해야겠다. 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들 때문에라도. 당연한 생각이지만 이제야 뒤늦게 하게 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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