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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Jan 26. 2020

57년생 김인순

우리집 주방도구들 이것저것
어머니가 그토록 드시고 싶어하셨던 커다란 감 홍시들

Rollei XF35

Kodak gold200

201911




 이번 설에는 부모님께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삭인 아내길을 떠나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다. 머니께서는 연휴 전에 미리 전화를 걸어 당부 말씀을 전하셨다.


 "며늘아, 아무것도 준비하지 마라. 우린 하루만 자고 갈 거다. 밥도 그냥 밖에서 사 먹자. 괜히 이것저것 준비하지 마라."


 그렇지만 그게 어디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있는 말인가. 아내는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덩달아 나 역시 아내의 눈치를 보게 됐다. 그래도 시부모님이 오신다는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괜히 과일이며 고기며 이런저런 찬거들을 사서 냉장고의 배를 든든히 불려놓고, 설날 아침에 해 먹을 떡국 준비하고, 네이버 레시피 검색을 해 가면서 고사리며 도라지 따위의 나물들도 무쳤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라셨지만 우리는 결국 이것저것 준비하게 된 거다.


 다행히도 나의 부모님들께선 한 입으로 두 말 하진 않으시는 분들이셨다. 설날 아침 떡국 빼곤 모두 외식으로 해결했고, 정말 딱 하루만 주무신 후 다음날 오전 일찍 KTX를 타러 서울역으로 향하셨다. 실은 음식 준비는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말수가 별로 없는 아내가 무엇보다 걱정했던 건 집에서 함께 보낼 긴긴 밤 시간 동안 시부모님들과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눠야하나, 였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의 어머니 김 여사님은 쉬지 않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대셨다. 며느리가 대화에 끼어들 틈도 없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많은 이야기를 하셨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딸자식이어서 겪었던 설움에 대한 토로였다. 그러니까, 이번 설 연휴 어머니의 기나긴 토크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82년생 김지영, 아니, '57년생 김인순'이 직접 겪은 생생한 이야기였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동안 아버지와 나는 잠자코 입을 닫은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청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딜 감히 남자놈들이 여자가 말씀하시는데 끼어들 수 있겠나.


 이야기의 시작은 나의 할머니, 그러니까 어머니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무렵부터였다. 어머니께서는 그때 그 시절 보통의 시어머님들과 다르게 당신에게 무척 잘 해주셨던 그분께서 돌아가신 건 슬펐지만, 한편으로는 더 이상 명절에 전을 부치고 생선을 굽는 등의 일을 하지 않게 되어 묘한 해방감 느끼다고 한다. 바야흐로 30여년 간의 장대한 강제 노역의 끝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절에는 왜 며느리들만 이 고생을 해야 하는거냐. 자들은 새벽에 제삿상에 절 몇 번 하면 할 일 다 끝났다는 듯 빈둥거리는데. 며느리의 경험담은 곧이어 여자로서 겪어야 했던 설움에 대한 이야기 물 흐르듯 부드럽게 전환되었다.


 시골 고향에서 제법 부잣집, 어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집에 기거하는 머슴'도 둘씩이나 됐던, 자식이었던 어머니셨지만 어릴  소원은 쌀밥을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끼니 때마다 동네 거지들에게도 따로 밥상을 차려 줄 만큼 만석군네 댁이었음에도, 쌀을 한가득 넣어 둔 2개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딸들 앞에는 쌀밥은 고사하고 매번 윤기 하나 없는 보리밥 참새 모이만큼 담긴 밥공기가 놓여 있었다. 재주도 용하지. 아궁이의 솥에 밥을 지을 땐 아래층엔 보리를, 윗층엔 쌀을 층지어 깔았고 한다. 밥이 다 되면 윗쪽의 쌀밥은 퍼서 남자들에게 주고, 그 다음엔 남자 머슴들의 차례였고, 그리고는 할머니와 어머니, 마지막이 되어서야 어린 딸들에게는 솥 바닥에 눌러붙은 반쯤은 시커멓게 탄 보리밥이 돌아오는 거다. 


 요즘 표현으로 말하자면 '걸크러쉬'였던 큰이모, 그러니까 외갓집에서 첫째 큰외삼촌 다음에 태어난 둘째였던, 그분께서는 어느날 도저히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실 수가 없었다.


 "야야, 짜증나그로  우리만 보리밥을 묵어야 하노."


 그래서 밥을 짓고 있을 때 몰래 부엌으로 가서 뚜껑을 열고 주걱으로 휘휘 어버렸다고 한다. 쌀밥이고 보리밥이고 다 섞여 똑같은 밥이 되어 버리라고. 다 같은 사람 입인데 왜 누구는 쌀밥이고 누구는 보리밥인가. 할아버지든 아들이든 머슴이든 딸들이든 모두가 같은 밥을 먹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물론 몇 번이나 쌀과 보리가 섞인 밥이 탄생하자 의심을 샀고 이내 그녀의 '작은 반란' 들통나서 호되게 야단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인의 밥상에 반찬으로 빠지지 않는 김치에서마저도 차별이 있었다고 하셨다. 갑자기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진다.


 "아니, 도 멀쩡하게 생긴 김치 고 싶었다!"


 큼지막한 줄기나 잎파리 쪽은 건드려 보지도 못하고 왜 볼품없이 남은 쪼가리 따위나 잔뜩 모아서 뚝배기에 담아주는 거. 그것도 반찬 그릇에 담아주지도 않고 이가 빠진 뚝배기 그릇 따위에다가. 차별도 굉장히 디테일했다. 그깟 김치가 뭐라고 딸들한테만 그랬던걸까.

 어머니께선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큰오빠의 밥상에 올려진 생선이나 고기 반찬이 부러워서 빤히 쳐다보던 때도 많았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할머니께서는 "저 년 저거 저거, 또 할아버 반찬 먹고 싶어한다. 되바라진 년."이라며 타박을 하셨다. 같은 여자이면서 너무하셨네 정말. 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외증조할머니 욕을 하며 어머니의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드렸다.

 비단 밥 먹을 때뿐만 아니라 밥을 먹은 이후에도 설움은 계속됐다. 상을 차리면 가장 안쪽 좋은 자리엔 할아버지가, 그 다음엔 아버지, 큰오빠, 막내 외삼촌 순으로 나란히 앉고 웃풍이 드는 문 쪽 끝자리에 큰이모와 작은이모, 그리고 나의 어머니 이렇게 세 딸이 나란히 앉아야만 했다. 뜨끈한 아랫목 따위는 꿈에서나 가능한 자리였다. 식사 끝날 때 즈음엔 숭늉물을 떠 와야 하는데 그때부터 딸들끼리눈치 싸움이 벌어다. 들은 생각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물을 가지러 가야한다. 어머니는 막내딸이라서 나름의 귀여움을 부려서 면제, 큰이모는 첫째딸이라 그런지 그런 하찮은 일은 이미 졸업했고, 결국 둘째딸인 작은이모만 매번 물떠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식사가 끝나갈 때마다 매번 입이 뾰루퉁하게 튀어나왔다고. 아, 그래서 외가 쪽 어르신들 중 작은이모 입술이 유독 두툼하시구나.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대체 누굴 닮은 건가 했는데 오늘에서야 이유를 알게 됐다.

 외갓댁 마당 한가운데엔 다란 감나무들이 그렇게나 많았다. 그런데 먹음직스러운 커고 미끈한 감은 한 번도 못 먹어보고 곶감도 잘 만들어진 건 언감생심, 매번 조그맣고 볼품없는, 상처투성이 녀석들만 어머니의 입 속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하나 없이 말끔한 홍시나, 커다랗게 잘 익은 곶감이 그땐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 그나저나 김치도, 감 홍시도 멀쩡한 걸 먹어보질 못했네. 어머니께서는 이야기 도중에 입맛을 다시셨다. 어쩐지. 그래서 가을만 되면 어머니께서 홍시를 자주 드셨구나. 나도 동생도 감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서늘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홍시를 한 박스씩 보내주셨던 거구나. 모든 행동에는 다 원인이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먹는 이야기만으로도 밤새도록 끝이 안 나겠다 이거. 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봐야겠다.


 "어무이, 먹을 거 말고 다른 이야기는 없습니꺼?"


 "아, 당연히 많지. 끝이 없다이. 억수로 많다카이."

 외갓댁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신 큰오빠는 아버지 다음으로 높은, 하늘같은 존재였다. 큰 도시에서 대학까지 다녔던 륭하셨던 분. 를 동경하던 어머니께서도 공부에 욕심이 나서 시골 동네를 떠나 근에서 가장 큰 도시인 경남 진주로 '유학'을 가셨다고 한다. 공부를 하겠다고 고등학교를 가니, '가시나 따위를 공부시킨다' 동네 사람들이며 고모들이 그리도 욕을 했다고 한다. 본인들은 배우질 못했으니, 어린 년이 샘이 나서 그던 것 같다고 하신다. 당시에는 여자가 고등학교까지 가는 게 드문 일이었으니까. 웃픈 표정이시다. 그리고 객지에서 힘들게 공부했던 시절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 이쯤 되니 마치 투머치토커 불리는 박찬호의 LA 다저스 시절부터 시작하는 끝없는 이야기 비슷한 낌이 난다. 삭의 며느리의 눈꺼풀이미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여기에서 끝내야겠다.


 "어무이, 벌써 밤 12시가 다 됐심니더. 낼 아침에 떡국 묵을라믄 인자 주무시야 될 거 같은데예."


 "아이코오, 시간이 벌써 이리 돼뿐나. 얼릉 자자 인자."


 그래서 57년생 김인순 여사의 회고록 다음 번 명절에 계속 이어듣기로 했다. 김지영처럼 평범한 한국 여성들, 우리 어머니와 이모와 고모와 숙모들의 이야기. 매번 듣는다 하더라도 과연 언제쯤이면 끝날 이야기일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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