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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인적인 체험 Dec 20. 2017

[한 모금] 감정의 농도

쿨민트, 모래시계 그리고 세 가지 농도

   퇴근길에 눈이 내렸다. 사선으로 흩날리던 눈은 점차 하늘에 무수한 빗금을 그으며 쏟아졌다. 나는 비로소 겨울을 맞은 것 같았다. 눈이 시렸다.

   올해 적는 마지막 글로 어떤 이야기를 적을까 하다가 얼마 전 갔던 카페의 티 팟(tea pot)을 떠올렸다. 함께 나왔던 파란색 모래알로 가득 찬 모래시계도 말이다. 좁다란 길을 한 알 한 알 빠져나오는 인공의 색에 매료되었던 그 저녁에, 명령처럼 바로 들이켰던 쿨 민트가 조금 쓰게 느껴졌던 게 기억이 난다. 나는 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겠다고 생각을 했다.



#1.  사랑의 농도. 

  

  내가 너를 물들이고, 네가 나를 물들이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사랑이라고 확신했던 감정 안에 복잡하게 뻗어나간 줄기들을 보면 나는 두려워진다. 

  우리의 사랑, 맛있게 들이킬 시간이 이미 지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어느날 차가운 얼굴로, 너무 쓰다고 미간을 찌푸리며 내려 놓는 것은 아닌지.      

  너무 써서, 사랑이 끝난 뒤에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너무 강렬해서 내 인생의 향과 맛은 너 하나면 된다 하는 건 아닌지.

  웃는 얼굴을 보고도 겁이날 때가 있다.


  그래도.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게 말이 돼? 하고 분명 생각하면서도 나는 너와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나도 너도 더 우러낼 것이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함께 라는 단어에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기를.

  같은 찻잔에 담겨 놀이공원처럼 언제까지고 빙글빙글 돌기를,

  웃을 수 있기를. 사랑에게.



#2.  우울의 농도.

   

  모래시계의 모래가 바닥에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4분 40초였다. 모든 모래알들은 중력 때문에 그 좁고 제한된 길목을 지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그 모래가 떨어지기 기다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겠지. 다 그렇게 산다고 해서 모두가 다 괜찮다고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힘들었겠다, 고생 많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우울은 창가에 앉아 맞는 저녁.

 '차차'라는 단어보다 '점점'이 어울리는 무거운 저녁.

  어둠이 스며들어 눈앞에 짙게 깔리면, 그 어떤 것도 의미있게 바라보기 어려워 지는 그런 시간 대에 사람을 머물게 한다.

  그럴 때에는 내 안에서 나오는 것도 어둠 뿐이라, 그럴 때는 내가 흘리는 눈물도 피도 침도 끈끈하고 어두운 빛을 띈다. 네가 곁에 와서 손을 잡아줘야 한다. 울어 줘야 한다. 우울을 옅어지게 만들도록 우리는 함께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침에 다시 만나서, 그다지 희망차지 않은 아침에도 희망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힘든 네가 저녁에 나를 떠올려줬으면 좋겠다.

 


#3.  인생의 농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는 말에는 동감을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갈수록 3살 차이고 5살 차이고 별 큰 차이가 없다는 말에는 어쩐지 토를 달고 싶었다. 아마도 설교 자리였기 때문에 반발심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나이가 들수록 더 이상 배우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성장이 멈췄기 때문에,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말해도 거리낌이 없으니까,  그래서 1살 후의 나도 3살 후의 나도 크게 변하지 않으니 그런 것은 아닙니까?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런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을 삼킬 줄 안다. 내가 나이가 먹었다는 것을 이럴 때 실감한다.


  나이가 먹으며 이미 우리는 우리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너무 쓰고, 떫고, 고약한 맛을 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계속해서 변해야지. 나쁜 것은 빨리 버리고 좋은 것은 더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올해의 나와 내년의 나는 또 달라야지 다짐을 하고.

 2017년과 안녕하며, 2018년에게 안녕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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