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인적인 체험 Jun 20. 2018

[한 잠] 부디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안녕, 드라큘라/하재연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꿈을 꾸는 것을 네 번 반복했고, 그것은 때로 지나온 계절들처럼 지나치게 뜨겁거나 차가웠습니다. 별볼일 없는 열 두 개의 글들은 나의 열 두 달처럼 지난했습니다. 당신이 종종 나의 글을 찾아주어서 나는 대부분의 수요일이 기다려졌습니다. 가끔 나의 어떤 문장은 당신에게 와닿았기를 바랍니다. 부디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안녕에 대한 나의 기억은 내가 생을 살아낸 시간만큼 쌓여 왔고, 지금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생겨나는 것들을 마주할 때 <모래의 여자>의 사구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낭만적인 안녕은 대학 시절 들은 시 창작 수업의 마지막 시간에서였다고, 그것이 내 인생에 분명 어떠한 잔상을 남겼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낡은 문과대학 건물을 떠올립니다. 건물로 들어서는 입구는 묵직한 나무 문이었고, 그 옆에는 교내 신문사들의 신문이나 대학내일 같은 것이 쌓여있었습니다. 문을 지나치면 바로 있는 복도는 늘 불이 켜져 있었음에도 어두침침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푸른 빛을 반사해내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층 마다 제멋대로인 계단의 높이 같은 것이, 계단에서 내려오는 누군가는 눈에 익었던 것이 연달아 떠오릅니다. 

  나는 문과대학 건물을 들어서면 항상 건물 자체가 응달져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시 창작 수업을 들었던 교실은, 2층에 있던 강의실 중에서 가장 햇빛이 잘 들었습니다. 피아노 덮개 같은 두터운 자주색 커튼 같은 것이, 라디에이터와 함께 기다란 교실 뒤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나는 그 교실에서 햇빛을 등지고 자주 꾸벅꾸벅 졸았습니다. 지정석은 아니었고, 출석부의 이름이 불리면, 네, 하고 때로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서도 시 창작 수업 시간은 대체로 기다려졌습니다. 나는 지금처럼 그때도 인기 없는 문장들을 써냈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교과서 속 서정시를 넘어서 현대시를 접하게 되었고, 나의 취향이란 것들도 그때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재연 선생님(시인이라고 적어야 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만)께 지도를 받았던 것은 아직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선생님 덕분에 시를 잘 몰라도 시를 좋아할 평생의 용기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수업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업을 마치며 우리 학생들에게 자신의 몇 안되는 사랑 시 중에 한 편을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자고 제안하셨고 햇살이 스며드는 그 교실은 같은 문장들을 읽어내는 여러 목소리로 부드럽게 웅웅 거렸습니다. 어쩐지 눈물이 났고, 그 순간에도 이 순간을 영영 잊지 못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안녕, 드라큘라

                                           하재연


당신이 나를 당신의 안으로 들여보내준다면

나는 아이의 얼굴이거나 노인의 얼굴로

영원히 당신의 곁에 남아

사랑을 다할 수 있다

세계의 방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햇살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살아 있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 뿐.

당신은 당신의 소년을 버리지 않아도 좋고

나는 나의 소녀를 버리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세계의 방들은 온통 열려 있는 문들로 가득하지만,

당신이 고통스럽다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 뿐.

당신이 나를 당신에게 허락해준다면

나는 순백의 신부이거나 순결한 미치광이로

당신이 당신임을

증명할 것이다.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낳을 것이고

우리가 낳은 우리들은 정말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처음 내는 목소리로

안녕, 하고 말해 준다면

나의 귀가 이 세계의 빛나는 햇살 속에서

멀어 버리지 않는다면.



   끝이 없다면 우리는 영영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을테니까, 다음을 말하려면 기존의 세계와 작별해야만 합니다. 삶은 이어질테고, 우리는 안녕과 안녕을 또 반복하기로 해요. 

  저의 '한 술, 한 모금, 한 잠'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부디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모습으로 곧 만나요.



매거진의 이전글 [한 술] 밥 먹는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