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請하지 않아도

by 풍경

시간을 달려

가장 먼저

바다에 간들 무엇 하리

앞선 길도

뒤안길도

달음박질해 봐야

모두가 꿈길 위인 것을

시간의 모래 위에

가장 먼저

발자국을 남긴들 무엇 하리

파도가 밀려와

단번에

휩쓸고 가버리면

그만인 것을

청請하지 않아도

바람은 절로 불어와

옷깃을 스쳐가고

청請하지 않아도

꽃은 절로 피었다가

어김없이 지고

소낙비도

허공虛空에서

작렬이 낙하落下하는 것을

/


끝날 것 같지 않던 한여름의 더위도 서서히 사그라들어 조석으로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름 내내 활짝 열어놓았던 창문도 하나둘 닫기 시작하고 며칠 전에는 도톰한 이불로 바꾸기까지 했다. 청하지 않아도 계절은 어김없이 때맞춰 찾아온다. 청했다 해도 그때가 아니라면 응당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계의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최고의 균형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이 세상도 겉으로는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도 결국 보이지 않는 더 큰 자연의 이치대로 단순하고 질서 있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른다. 삶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펼쳐진 삶이 모두 나의 노력으로 거둬들인 성과인 것 같지만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나도 모르는 그 어디에선가, 그 어느 누구의 작은 땀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나의 삶에 기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청하지 않아도 가을은 찾아들 것이고 청하지 않아도 단풍은 붉게 물들어 점점 깊어가는 사색의 숲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향할 것이다. 미리 청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맥없이 주저앉지도 말고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흐름 속에서 영혼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다.

# 청請하지 않아도 / 2021. 8. 19. pung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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