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봄 01
친구 C는 강남에 산다. 또 다른 친구 Y는 이웃 동네 주민이다. C가 강을 건너 우리 동네로 오는 일은 극히 드물고, Y는 운전을 하지 않아 나와는 중간 어디쯤에서 접선하여 먼 동네로 커피를 마시러 간다. 우리 셋이 만날 땐 보통 압구정으로 진출(!)했다. 백화점 1층이 주 약속 장소였는데 Y와 나는 그 참에 새로 나온 거 구경해야 한다고 그랬던 옛날이 있었다. 요즘은 주로 C의 직장 근처 한남에서 만난다.
C가 언젠가부터 머리 할 곳이 마땅치 않다고 했다. 내가 다니는 곳으로 한번 오겠다고 했는데 이번 주 화요일 미용실 간다고 단톡에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C가 왔고 Y는 머리도 안 하는데 놀러 왔다. C가 머리 자르고 샴푸하고 드라이하는 동안 Y와 나는 소파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서로 사진을 보여주며 근황 얘기를 했을 거다. 기다리는 손님에게 민폐가 될지 걱정하지 않았으며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듯 이야기가 이어지는 사이 C의 머리가 금세 끝났다.
딸이 기숙학원에 들어가고 두 가지 결심을 했다. 몸과 마음을 잘 돌볼 것, 친구를 만나 자주 놀 것. 이 결심은 대학에 갔어도 유효했겠지만 오히려 좋은 건 저녁이 완전히 자유로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근처 이자카야로 갔다. 우리의 안주발 역사는 스무 살 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그날도 저녁 겸해서 1인 1메뉴, 안주 세 가지를 시켰다. 첫 안주가 숙성회였으므로 주종은 사케.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내 근종 이야기로 흘러갔다. C와 Y는 이미 차례로 수술을 했다. 생일이 가장 늦은 나는 다음은 나냐고 무슨 수술을 그렇게들 하느냐고 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병원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곳에서도 우리는 오래 함께 앉아 있었다. 병문안 온 손님이 아니라 스무 살 때처럼 수다를 떨다 왔다. 힘든 순간을 힘들지 않게 만들어주는 힘이었다. 내가 수술을 하게 된다면 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안주 접시가 싹 비워졌다. 네 번째 안주에 맞춰 오키나와 생맥주를 시켰다. 아무래도 대학병원은 부담스럽다고 투덜대는 내게 C는 검사 결과도 모르면서 말이 많다며 슬금슬금 뭔가를 꺼낸다. 친구는 보석감정사 자격증도 있고 보석 디자인을 하기도 해서 자주 액세서리를 선물한다. 그날 Y는 팔찌를, 나는 목걸이를 받았는데 우리는 받은 즉시 찬다. 기가 막히게 마음에 들고 사이즈는 잰 듯 꼭 맞다. 자리를 정리하며 이자카야 밥값은 내가 내겠다고 우겼다. 삼십 년 전부터 더치페이를 했던 우리는 누가 산다는 게 참 어색했는데 나는 꼭 밥을 사고 싶었다. 올해, 특히, 많이. 그건 어쩌면 삼십 년 나를 키워준 친구들을 향한 뒤늦은 애정 고백이었다. 대학 시절 춘천 어디였을 엠티 장소에서 가장 먼저 취해버린 나를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이는 C였고, 앞을 보고 달리는 차 안에서 오가는 길 두 시간씩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Y였다. 친구와 한 곳을 보며 함께 간다는 기쁨을 알았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지 않을 때 어느 때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함께 달린 거리가 수천 킬로는 되겠지? 내게 지난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무엇이었나 알려면 우리를 보면 되었다.
남은 사케는 나더러 가져가라니 가방에 넣는다. 배가 불러 십 분쯤 걷다 커피 마실까 했는데 Y가 곧 카페 닫을 시간이라는 걸 알려준다. 그렇다면 맥주 한잔 더 하자, C가 말한다. 우리는 감자튀김과 빠삭태를 시켰다. 영롱한 빛을 내는 맥주가 등장하고 이야기는 밤을 좇아 깊어져 간다. Y와 나는 둘 다 딸이 있는데 21세기 사람인 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살 거라고 입을 모은다. 나는 나를 힘들게 한 부모가 무거워서 거리를 두고 그리워하는 것이 차라리 좋은 답이 되었다고, 어디서 쉽게는 할 수 없는 말들을 했다.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니었는데 책임이 져졌고 부모를 미워한 일이 다시 죄책감으로 돌아오는 게 힘들었다고 하니 Y가 말한다. 그러게, 너는 아무리 힘들어도 기대질 않더라. 맞다, 가능하면 기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의 ‘너는… 그러더라’는 나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말이었다. 내가 나를 지켜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친구들이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의 말과 더불어 책을 펴면 이런 말들이 들어왔다.
‘나는 여러모로 결핍이 큰 사람이었고, 어려서부터 삶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벌처럼 느낀 적이 많았다. 그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포장할 때조차 그랬다. 그런 내가 나의 결핍에 감사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데까지 쉽게 점프하여 갈 수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문학동네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것이로구나. 마음으로 밑줄을 그었다. 완전히 새길 수 있다는 듯이 진하게 그었다.
택시 타고 가라고 했더니 C는 택시비를 확인해 보곤 지하철을 타겠다고 한다. Y는 버스도 있는데 둘은 올 때도, 갈 때도 지하철로 함께다. 이제 우리에게 미성년 자녀가 없어서 그동안 모은 여행비 털 날을 기다린다. 호화 여행도 가능하다고 큰소리쳤는데 나는 교토에 가고 싶다. 이다혜 기자의 책 《교토의 밤 산책자》 사진을 찍어 올린다. ‘얘들아, 나는 교토에 가고 싶다?’ 했더니 ‘조아조아’, ‘여행사 말구 우리끼리’ 하는 기대했던 답이 돌아온다. 올해는 엄마가 나를 키운 햇수와 친구들이 나를 키운 햇수가 꼭 같아진 해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여러 질환으로 고생한 어머니를 늘 걱정해야 했던 C,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Y, 강한 두 부모 사이에서 눌려버린 나는 서른 해 서로를 지켜보고 키웠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엄마보다 훨씬, 훨씬 더 좋은 친구를 꼭 만나라고, 네게도 그런 행운이 따르면 좋겠다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