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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

2부 봄 02

by 싱싱샘

화요일 나는 머리를 싸매고 앉았다. 거실 넓은 테이블 위에 책이 적어도 열다섯 권 이상 쌓여 있고 A4 용지에 적은 메모는 앞뒤로 빽빽하게 차 있는 상태다. 머리를 높이높이 질끈 묶었다. 자, 이제 결전의 순간, 최후의 순간이다. 책 모임에서 읽을 책을 정해야 하는 때가 왔다.


3월 초는 분주하다. 몸이 분주한 것보다 마음이 분주하다. 아이가 학교까지 다니고 있었다면 더 그랬을 텐데 지금 딸은 내 곁에 없다. 6년간 오전 다섯 시 반에 울렸던 알람만 흔적으로 남았다. 그 흔적은 울리지 않도록 꺼진 회색이었다가 삭제되어 마음에만 남았다. 3월 2일은 글쓰기 교실 토요반 개강일이었다. 오전 두 반, 오후 두 반 해서 총 네 반 수업을 한다. 아이들은 56명인데 봄학기에 새로 만나는 친구는 일곱 명뿐이니 나머지는 구면이다. 글쓰기 수업은 방학 같은 것도 없어서 지난주까지 겨울학기, 이번 주는 봄학기 보통 그렇게 이어진다. 그래도 새롭게 안녕? 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으로 분주한 것일까.


토요 수업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들을 수 있고 첫 2년은 기초반, 그다음 2년은 심화반에 모여 글을 쓴다. 기초반이니 심화반이니 하는 말은 어른들 편의상 붙인 이름이고 우린 모여 글을 쓰는 것이다. 자유학년제가 생긴 때부터 시험 없는 중학교 1학년까지 계속 다닐 수 있도록 했더니 이 녀석들이 중2가 되어도, 중3이 되어도 그만두질 않는다. 그래서 봄 수업엔 중3이 되는 아이까지 포함되어 있다. 얘들아, 자유학년제 없어져서 이제 중1도 시험 본다고!


거의 그랬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겨울이 되어서야 우리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아쉽게 헤어지는 것이다.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 가서 만나자. 함께 글 쓰고 이야기 나눈다는 것이 뭘까 생각하게 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책도 읽으면 좋을 텐데 우리나라 청소년에게 프린트 읽을 시간은 주어져도 책 읽을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교실은 프린트물로라도 만들어 악착같이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는다.


3월 6일 수요일은 ‘살아갈 날들을 위한 읽고 쓰기’ 책 모임 개강일이었다. 내가 화요일 오전 머리를 질끈 묶은 건 그래서다. 열여덟 명이 함께 모여 한 계절 보낼 책이 결정되는 날. 내 손끝에서 쳐진 문서가 출력되는 날. 그 일이 몹시 즐겁다. 어려운데 즐거운 그런 마음은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박연준 시인이 2년 동안 창비 팟캐스트 〈김사인의 시시(詩詩)한 다방〉 작가로 일하며 힘들고 재미있었다고 한 말을 나는 온몸으로 이해할 것만 같다. 그러니까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 잘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봄에 읽을 책 세 권은 각각 유명한 작가, 매력적인 작가, 공부할 작가 세 사람이다. 모두 세상을 떠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작가들을 작품으로 만난다.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가 19세기와 20세기를 오가고 서울에 사는 내가 영국과 콜롬비아를 오간다. 매주 나눠 읽을 책 한 권 더하여 네 권을 정해 놓으니 마음이 가득 차 부자가 된 느낌이다. 상상한다. 천천히 읽노라면 벚꽃이 필 것이다. 봄비가 오는 날도 있을 것이다. 천지가 초록초록해질 것이다. 그 초록은 물감이 흉내낼 수 없는 아주 고운 연초록에서 시작할 것이다. 외투를 벗고 가벼운 셔츠를 입을 것이다. 차에서 올 처음으로 에어컨을 틀었다고 한 4월의 어느 날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5월을 맞을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소녀가 태어난 달. 우리는 그렇게 한 계절을 또 지날 것이다. 책과 함께하는 계절 여행이라니, 남은 날도 이렇게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봄학기 책 모임 첫날을 앞두고 있었다.


고등학생 과외는 그만해야겠다고 고민하던 참이었다. 나는 중학생을 기르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누군가는 고등학생은 생활지도를 안 해도 되어서 좋다고 했지만 나는 그 생활지도가 포함된 과외가 좋았다. 딸을 키우면서 좋았던 것도 그 생활지도였다. 지지고 볶고라고 비유하거나 간추리면 안 되는, 정말이지 어느 날은 물건이 날아다니고 또 어느 날은 날 선 말이 가슴에 꽂히는 전쟁 같은 날이 결국은 지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면 아이들은 훌쩍 커 있었다. 저만치 가 있었다. 그렇게 자주 거칠고 가끔 부드러운 생활지도를 거쳐 고등학교에 올려 보낸다. 계속 가르쳐달라고 하는 부모님도 계신데 나는 딸의 고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더는 고등학생 과외는 하지 않기로 내심 정했다. 그 시간에 하고 싶은 일이 한 가지 생겼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고민은 오래 수업한 센터가 문을 닫는다는 거다. 센터 사정이라 어쩔 수 없지만, 그곳에서 아끼는 제자를 많이 만났기에 아쉬운 마음부터 들었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지금 공부하는 친구들은 어쩌지, 제자들은 별생각 없을지 몰라도 선생은 어느새 걱정하고 있었다. 내 일은 알고 보면 짝사랑이다. 가르치는 일도 기르는 일도, 짝사랑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짝사랑이 오래도록 좋았나 보다. 마음껏 그냥 다 주어버려도 괜찮은 일, 그런 일 아니던가.


오랜 짝사랑이 부린 마법일까. 점심 무렵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업 의뢰였다. 센터 소식을 들은 한 담당자가 연락을 해왔다. 원하는 요일, 시간, 인원수, 심지어 책상 배치까지 나는 술술 말하고 있었고 담당자는 다 들어주었다. 로또에 당첨되면 이런 마음일까.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으면 이런 마음일까. 전화 끊고 생각하다 보니 나 참 사랑 깊네. 그 사랑 참 깊었네.


책 모임 있는 수요일 오후에 그간 하고 싶었던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쓰고 싶은 사람이 모였다. 1차로 커피를 마시며, 2차로 떡볶이와 충무김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박한 발족식이다. 내 마음에 발자국 남기며 모임의 한 걸음을 뗐다. 주인아주머니가 저녁 장사를 준비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갈 뻔했다. 그런 시간은 시계가 멈추고 그곳엔 우리만 있는 것 같다. 타인이 우리를 깨우기 전까지 꿈을 꾸듯. 어째서 하고 싶은 일은 그런 것인가. 예의 박연준 작가는 읽기는 공들여 듣기, 쓰기는 공들여 말하기라 했다. 공들여 듣고 공들여 말하는 사람, 사랑이 될 것이다.


나중에라도 다시 생활지도를 벗어나 고등학생 제자들을 만나게 될까. 울긋불긋 여드름, 걸걸해지는 목소리, 털이 숭숭난 팔다리가 내 눈엔 어찌 그리 예쁜가. 선생의 짝사랑엔 답도 없다. 내일은 토요일, 다시 초등학생 만나 함께 글 쓰는 시간이다. 토요일엔 수업이 많아 제대로 된 점심 먹는 것도 힘들다. 간헐적 단식, 오히려 좋다 생각한 지 오래다. 맘도 몸도 힘든데 좋다. 저, 오늘도 내일도 일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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