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보내며 2017. 6. 27.
작년, 그것은 비보였다. 대학 동창의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 조수석에 탄 이는 살았는데 운전대 잡았던 그는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친구에겐 내 딸과 동갑인 아들, 그 아래로 한 아이가 더 있었다 했는데. 한동안 동창 생각을 계속했다. 그 친구가 이어준 사람이 첫사랑 박군이었고 말 그대로 하루 걸러 술을 펐던 이십 대에 그녀, 박군 그리고 내가 있었다. 마음이 자꾸 과거를 불러냈다. 이십 년 지나 누군가 당할 일을 그때 우린 몰랐구나. 몰랐으니 살았구나. 살았는데 당했구나. 운명이 슬펐다.
“야아, 니 물건이 우리 집에 한 박스 있다.”
친정엄마가 따뜻한 봄날 전화를 했다.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박스, 뭔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결혼하고 가져오지 못했다. 않았나. 아무도 없는 대낮 뚜껑을 열었다. 나는 박군과 걸었던 시간을 만났다.
범생이로 사춘기에 말썽 한번 안 부리고 팔다리 한번 안 부러지고 학교에서 야단 한번 들은 적 없이 졸업과 입학을 했다. 스무 살까지 나는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그냥 가만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꽤 긴 기간 밤이면 이복 삼촌에게 성추행당했던 어린 그림자가 있었고, 발표를 시키면 쿵쾅대는 심장 소리에 말하는 게 힘들었던 유약한 그림자가 있었고, 두꺼운 동글뱅이 안경 때문에 자신 없어 했던 소녀의 그림자가 있었는데. 나는 얼어있었다. 나는 내 그림자마저 연민했다. 그런 내가 술을 알았다. 그와 함께.
대학 입학 후 두 번째 미팅에서 만난 박군과 나는 동갑내기였다. 단둘이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진주에서 서울로 대학 온 그 애의 친구들과 함께였다. 사람이 편하지 않은 나였지만 상황이 편했다. 친구라는 기본 설정이 그랬고 93년의 우린 술 좀 마셔도 되는 대학 1학년이었다. 박군은 175쯤 되는 키에 입이 조금 크고 툭 불거진 여드름 몇 개는 있었으나 얼굴도 성격도 평범하고 순했다. 머리 안 감으면 모자, 머리 감았어도 모자. 청바지에 폴로티 한 장 입고 뒷주머니 지갑이면 외출 완료다. 피부 한 겹 아래 촘촘히 가시가 있을 것 같은 나와 달리 ‘됐다!’ 하는 사투리까지 정겨웠다. 나는 그 모임에서 박군의 여친이자 일원이 되어갔다.
박군 그리고 친구들과 떼로 시작하는 술자리는 참으로 흥겨웠다. 내 주사는 웃기, 울기, 걷기. 그 사이 어디쯤 정리. 휘문동 호프집에 삼천, 오천짜리 피처가 놓이고 우린 술을 털어 넣었다. 기억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비본질의 수다는 삶을 가볍게, 한 잔 한 잔 차곡차곡 들어가는 술은 삶에 기운을 주는 것 같았다. 웃음이 잔 따라 한 바퀴 돌면 나는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술이 더 들어가면 조용해졌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 속에 가만히 갇힐 때 테이블 위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슬며시 정리를 했다. 김치찌개를 중심으로 좌우 안주 정렬, 각 사람의 우측에 물컵이 가도록 정렬, 흐트러진 수저 위치도 다시 잡아주고 앞접시는 중앙에 가게, 냅킨통은 한구석에. 친구들은 그랬다. ‘J 취했다. 또 정리한다.’ 멈춰야 하는데 급하게 마신 술이 나를 털어 넣는다. 밤 열두 시가 되면 거리로 나선다.
나의 박군과 참 많이 걸었다. 같이 걸었다기보다 일방적으로 내가 걷고 그가 쫓아왔다. 걷기 시작할 땐 이미 취한 후라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술만 먹으면 왜 그렇게 걷고 싶었을까. 왜 사는 걸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질문에 답할 수는 없어도 눈앞의 물건은 정리할 수 있듯 인생의 향방을 몰라도 발걸음은 옮길 수 있어서였을까. 박군은 술 취한 여자가 불안불안했겠지만 나는 그때만큼 불안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상도 그 애는 뭘 캐묻는 법이 없었다. 집에 다다르고 술이 어느 정도 깨어 7센티 힐 신고 미니스커트 입고 대학파일 끼고 잘도 걸어가는 등 뒤에 박군이 늘 머물렀다. 기억을 놓쳐 안타까워 죽겠는데 우리의 첫 키스도 그 거리에서였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는 않았어도 내게 사랑은 흔들리는 나를 가만히 안아주는 실체였다. 나는 딱 어린아이였는데 자주 손잡고 자주 안고 15센티 키 차이의 박군 가슴과 어깨 어디께 냄새를 맡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사 년 뒤 새로운 사랑을 맞아 이별을 고했다.
‘영원히 사랑한다. 니 꿈을 꾸고 일어나는 아침이면 정말 기분이 좋다. 내 꿈 많이 꿔라. 혹시 아니 꿈에서 서로 만날지.’
‘항상 보고 싶고 항상 니 생각한다. 자주 연락은 못 하지만 니가 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니 생각한다. 보고 싶다.’
연애편지 속 박군은 늘 고백하고 있었다. ‘편지 안 할 거 알지만. 그냥 가르쳐준다. 나쁜 놈아.’ 이십 년 전에도 글자들이 이렇게 서걱이게 읽혔나. 군대 가고 연수 다녀오고 유학을 가도 이어졌던 편지가 1997년 소인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니 믿음직한 연인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뭘 잘해줬다는 거고 그는 왜 그토록 날 지켜주고 싶어 했나. 그는 보이는데 나는 보이지 않는다. 5월에 편지함을 열어 6월 말이 되도록 정리하지 못했다. 침대 아래 박스는 곱게 닫혀 있다. 낄낄대며 시작해 몇 날 며칠을 가슴앓이했다.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연락이 끊길 수 있구나. 친구 남편의 사고가 떠오르고 박군이 떠오르고 휘청였던 스무 살이 떠오르고 서럽게 박군이 보고 싶다. 문득! 아, 내가 편지 한 통을 버렸지. 마지막으로 받은 편지였다. ‘이제 너를 보낸다.’ 사라진 편지의 일곱 글자 또렷이 박힌다. 박군아, 사랑받은 줄 몰랐는데 사랑받았구나. 답이 늦었네. 사랑했다.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