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겨울 06
병원에 가야 할 날이 왔다. 더 미룰 수 없을 정도로 증상이 있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었으면 더 빨리 갔을까. 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정에 몸을 맞추는 삶이 일단락됐다. 졸업식이 끝나고 나의 어여쁜 소녀는 기숙학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병원에 갔다. 산부인과 병원은 언제나 껄끄러운 곳이다.
접수 번호를 뽑는다. 어쩌면 예약만 하고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접수처에 며칠 전 추천받은 선생님 세 분 이름을 주르르 댄다. 두 번째 선생님 진료 당첨이다. 예진실에서 간단한 문항에 답변을 한다. 오십을 넘기니 아직도 생리를 하는가 질문을 받는다. 초경 나이, 출산한 아이 수, 유산 경험, 피임약 복용 기간도 있다. 모유 수유 기간도 있었네. 이 질문지는 여성 삶의 기록이 된다. 병원에서 나는, 이름 아래 나열된 이 기록으로 판단될 것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8번 방 앞에 서류를 꽂고 기다린다. 이름을 부른다.
의사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한다.
아랫배에 만져지는 것이 있어요.
자궁경부암 검사와 초음파가 함께 이루어진다.
혹입니다. 혹입니다, 앞에 ‘다’라는 말이 있었다. 못 들은 척하고 싶었다. 당장 급하게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뱃속에 10센티 이상의 혹이 있고 큰 병원에 가서 CT나 MRI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 꼬치꼬치 물었다. 혹이 어디에 있대? 몰라. 의사가 뭐라고 말했어? 별말 안 했어. 친구에게 하여튼, 너는… 하는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들으며 집에 도착했다. 최악의 상황, 자궁 적출이겠지. 그런데 문득 그게 정말 최악일까. 어떤 시기가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지나고 보면 또 다른 게 보이지 않았나. 그때에도 여전히 최악이어야 진짜 최악일 텐데. 그래서 함부로 최악이라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Web 발신]
<산부인과 ***선생님 진료실>
2/19일부터 검사 및 진료의 원활한 진행이 어려워졌습니다. 외래 진료 시 상당한 진료 지연이 예상되며 처치 및 수술, 입원도 불가할 것 같습니다. 급작스럽게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이점 양지하시어 꼭 내원하실 분 외에는 한 달 이후로 변경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의료계 파업 뉴스는 계속 보고 있었다. 검사를 받지 못하거나 수술 날짜 잡기가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던 차 진료 이틀 전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삼십 분쯤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모든 게 참 좋아진다. 카드만 대면 환자 도착을 알리고 혈압, 키와 몸무게가 척척 전송된다. 접수처에서 대기한다. 기다리는 시간, 책 한 권만 있으면 충분하다. 어이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책 한 권을 들고 갔다. 그리고 그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어렸던 데다가 그 후에 살아온 모든 나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 일은 차라리 꿈이랄까, 아득하면서도 끔찍한 악몽처럼 밤마다 되살아나고 때로는 낮에도 나를 괴롭힌다. 햇살에 눈이 부시고 먼지가 날리는 텅 빈 거리, 푸른 하늘, 검은 새의 고통스런 울음소리,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손이 나를 잡아 커다란 자루 속에 던져 넣고, 나는 숨이 막혀 버둥거린다. 나를 산 사람은 랄라 아스마이다.’ 《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문학동네
아, 이러니 내가 어떻게 최악을 논해. 나는 주인공 라일라의 삶 속으로 곧장 들어갈 것이다.
생각보다 병원은 한산했고 구역이 잘 나뉘어 있었으며 사람과 기계가 호흡을 맞춰 잘도 돌아가고 있었다. 힘들어 어쩌나 싶을 정도로 배가 부른 임신부, 비니를 썼는데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가 짧은 분, 그리고 나처럼 아무 티도 나지 않아 환자인지 보호자인지 모르겠는 근종을 가진 여자, 여기는 산부인과다. 동시에 흉부외과 코드블루를 알리는 방송이 나오는 종합병원이고. 순간 철렁했는데 잠시 후 코드블루 종료를 알렸다.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다 잠깐 아득해진다.
병원 밖으로 나오니 눈이 폴폴 내린다. 자고로 눈이라는 건 그냥 맞아야 하는데 바닥이 질척인다. 비로 바뀌기 전까진 우산을 쓰지 않기로 한다. 까만 패딩에 작고 귀여운 것들이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걸 보며 걸었다. 삼십 년 전에도 나는 여기 신촌에 맨날 있었지. 나의 연애사가 시작된 곳, 골목까지 훤히 알지. 그사이 버스 번호는 바뀌었지만 정류장도 속속 알지. 인생 잘 통과하자고 마음먹으니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정혜신 의사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살아 있는 것이 위대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책에서 배웠다. 살아 있는 것을 줄이면 삶이다. 내 삶만 살았다면 몰랐을 이야기들이었고 사는 일이 대단하다고 이야기들이 알려주었다. 유괴당한 주인공 라일라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안다. 그 삶을 다시 읽는다. 놓친 것이 있는지 세세하게 살피기로 한다. 내 삶이 어떻게 될지 그건 모른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 사는 일을 해보기로 한다. 오랜만에 백화점에 들러 맛있는 걸 사 가야지. 앞으로 병원 오는 날엔 그러기로 한다. 아침에 못 마신 커피 생각이 간절한 나는 살아 있다. 삶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