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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나가보자고!

2부 봄 09

by 싱싱샘

수업을 막 시작한 5월 어느 저녁이었다. 거리가 꽤 있어 무슨 노래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이건 분명 공연이다. 생각해보니 대학 축제 기간이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중간고사를 마치고 한숨 돌릴 때이긴 하지만, 대학생이 된 것만으로도 부러운 형들이 신나는 축제 현장에 있다니 얼마나 부러울까. 샘! 다른 대학 축제에도 갈 수 있어요? 신나게 대답해 주려는 바로 그때 왜 갑자기 내 가슴이 뛰느냔 말이다.


5월의 비는 공휴일에 왔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싫지 않다. 내게 비는 대지를 공평하게 적시는 평화로움이다. 종일 들을 수 있는 배경음악이다. 빗소리 안에서는 무얼 해도 어울린다. 그런데 오랜만에, 날이 이렇게 좋았구나, 5월이면 이렇게 좋았었구나, 처음 깨달은 사실처럼 느껴졌다.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보드라운 초록 잎들이 하늘에 그려져 있었다. 습도가 느껴지지 않는 바람이 팔에 감겼다. 내가 나가는 날이면 비는 그치고 미풍이 불었다.


***


이케아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 파주 작은 수입 매장으로 있을 때부터 나는 그곳을 알았다. 헤이리며 근처 아울렛, 출판단지를 수도 없이 갔다. 홍대에서 합정, 상수에서 망원까지 긴 시간을 두고 다니면서 보물 같은 곳이 생겼다. 손바닥 지도처럼 훤한 몇 군데가 더 있다. 프리랜서이기에 며칠을 붙여 쉴 수 없는 나와 학교에 매여 있는 아이에게 그것이 가능한 휴가였고 휴식이었다. 아이 어릴 적 제2의 고향은 속초였다. 편히 빌릴 수 있는 곳이 있어 시간이 허락되면 속초로 달려갔다. 나는 운전을 즐겼고 바다가 그리웠다. 길지 않게 머무는 숙소까지 아꼈던 것 같다. 새로운 걸 찾지도 않고 매번 들르는 곳만 갔는데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스치는 초록까지 모든 것이 충분했다. 초록은 때로 빈 들판이었고 그 들판에 눈이 내리기도 했다.


간간이 가던 여행마저 끊어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태어난 지 한 달 된 강아지가 우리 집 둘째로 오고 시간이 흘러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으며 이어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예민한 강아지, 마음의 여유가 없는 아이,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듯 이어진 일들 속에서 나는 여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4월 말이었다. 친구와 두 주에 한 번 함께 하는 일이 생겨 주기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날은 끝나고 성수에 가보자고 했다. 좋아하는 브랜드의 개러지 세일이 그곳에서 있었다. 성수라면 두어 번 가본 게 전부인 동네다. 집에서 멀기도 하고, 모든 팝업 스토어는 성수에서 열린다고 할 만큼 핫한 곳이지만 그래서 엄두가 안 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궁금해지는 곳. 꼼꼼하고 신중한 나인데 세일 장소를 잘못 알았다. 가장 빠른 길로 검색해도 걸어서 23분, 기온이 28도까지 올랐고 텀블러까지 챙겨 무거웠지만 슬슬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창고 세일이었으니 작은 돈 쓰는 기쁨 크게 누리고 나와 다시 걸었다. 낯선 곳의 두려움은 어디가 어딘지 감잡을 수 없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가게를 만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라면 그것이 즐거움이 되지 않던가. 지나다 보니 빈티지 마켓이 열려 있다. 앰프는 최대 볼륨이 아닐까 싶었다. 한 바퀴 돌고 나가 소리가 작게 들릴 때쯤, 살까? 친구가 물었다. 생각날 것 같다면 사야지. 우리는 되돌아가 친구의 원피스를 샀다. 천값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귀여운 개 한 마리가 자고 있었는데 이 시장통에 잠이 오나 싶었지만 일 없을 땐 눈 붙이는 게 최고다. 한낮에 예쁨 실컷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명한 베이글 가게가 근처에 있었다. 배가 고프니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영등포점은 줄 서서 사 간다고 들었는데 이곳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갔을 때는 늦은 오후라 남아 있는 게 몇 없었다. 무화과 콩포트와 갈릭 허브 빵을 고르고 라거와 에일을 한 잔씩 시켰다. 베이글과 맥주라니. 이 조합 사랑해, 사랑해! 한산했다. 마음은 한가했다. 커다란 창 밖으로 천천히 해가 지고 있었다.


가슴이 뛴 이유를 생각해 본다. 부모님이 든든하게 계셨고 아직은 취업 걱정도 없던, 낭만이 남아 있는 이십 세기 끝자락이었다. 어른으로서 책임은 다 지지 않아도 되는 스무 살, 나는 그때처럼 마냥 걱정 없이 놀고 싶다. 유난히 날이 좋다고 몇 번이나 느낀 건, 좀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필요한 거 사러 가는 것 말고, 잠깐 나갔다 오는 것 말고. 속초로 내달렸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멀리 교토 같은 곳에 가는 것. 봄이면 벚꽃을, 가을이면 단풍을 보러 가고 싶다. 여름에는 장마와 무더위를 느끼고, 교토의 겨울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렇게 어딘가를 제3의 고향 삼아 머무를 날이 올까. 이십 대 첫 직장에서 정산 받은 퇴직금을 들고 유럽으로 날아갔다. 다녀오자마자 사진을 인화해 앨범 두 권으로 만들어 두었다. 사진 속 나는 토끼 같은 앞니를 보이며 웃고 있다. 보장된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돌아보니 행복했었네.


물리적으로 아이가 곁에 없으니 몸이 기억을 해낸 걸까.


꿈을 꿔본다. 작은 꿈부터 꾼다. 낯선 곳에서 놀아야지. 맨날 가는 밥집 말고, 익숙한 서점 말고. 낯선 곳에서 헤매야지. 안 입어본 옷을 고르고 차가운 걸 좋아하지 않지만 빙수를 사 먹어야지. 대신 최고로 맛있고 예쁜 걸 골라야지. 최근 삼십 대가 주로 듣는다는 팟캐스트를 구독했다. 새롭고 낯선 세계가 그곳에 또 있었다. 에피소드가 무려 사 년 치나 쌓여 있다. 이야기를 훔치는 기분으로 듣다 깜짝깜짝 놀란다. 자유롭구나. 부러웠다. 그들이라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나도 ‘인생 힘든데 재밌네, 재밌는데 힘드네.’까지는 이해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안다면 통할지도 모르겠다. 내 익숙한 세계에 머무르며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깨워주면 좋겠다. 낯선 세계는 낡지 않게 해준다. 성수에서 놀다 어느 날 교토로 옮길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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