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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축하해

3부 여름 01

by 싱싱샘

5월을 좋아했다. 우리 부부가 아이를 갖기로 계획한 2004년 여름, 첫 달에는 임신 소식이 없었고 둘째 달엔 출장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들어간 음식점에서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두루 잘 먹고 잘 소화시키는 내게 그 느낌은 생소했기 때문에 혹시… 할 수밖에 없었다. 임신이었다.


출산 예정일은 5월 19일이었다. 나는 5월 첫 주까지 회사에 출근했고 똑바로 누워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아기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산부인과 의사인 이모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당장 쪼그려 앉아 걸레질도 하고 나가서 걸으라고 했던가. 첫 아이가 그렇게 쉽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막달 59킬로그램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보이는 얼굴로 막 더워지기 시작한 날씨에 걷고, 걸었는데 하아, 지루했다. 이러다 6월에 낳는 것 아닐까. 당시에는 자연분만이 가능하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예정일을 열흘 넘겨 5월 30일 유도 분만을 위해 입원하라는 의사의 명이 떨어졌다. 성별도 알려주지 않아 노랑과 연두로 아기용품을 준비한 부부에게 소녀가 왔다.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숱 많은 까만 머리 아기 소녀였다.


여기서 시간은 훌쩍 건너뛴다. 2024년 아이가 스무 살이 되었다. 첫돌을 시작으로 열아홉 번의 생일을 보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우리는 의식 치르듯 방을 정리했는데 졸업 앞두고 딸은 가장 많은 물건을 치웠다. 나는 배냇저고리 두 벌을 남겼다. 아이를 기르며 절절히 느낀 것이지만, 아기 소녀는 이제 없고, 앞니 빠진 소녀도 없고, 교복 입은 소녀도 없고, 내 앞에는 스무 살 소녀만 있다. 그리고 지난 생일에 딸은 기숙학원에 있었다. 당사자 없는 생일을 처음 맞았다.


나의 엄마, 전라도 출신 권 여사는 요리하는 걸 좋아해 정성껏 차린 음식과 풍성한 과일로 생일상을 거하게 차려주었다. 친구도 초대했다. 그것도 국민학교까지의 기억일 뿐이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모든 날이 뭉뚱그려져 있다. 행복한 순간조차 행복하기도, 행복하지 않기도 했다. 생일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된 건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내 생일을 기억하지 않아 주었으면, 알은척하지 않았으면 했다. 삶이 행복하지 않았으므로 생일 같은 게 뭐라고, 하는 비뚤고 불퉁한 마음이었다.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일 때였다. 반복되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로 지쳐갔는데, 내 생일인 가을부터 딸은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고 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나 모르게 택배를 어떻게 받는 건지 그해 크리스마스엔 깜짝 이벤트를 열었다. 색이 고운 울 양말과 향초, 내 이름이 새겨진 키링은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 중간중간 화이트로 수정해가며 작고 단정한 글씨로 꼼꼼하게 쓴 손편지. 어느 날 사춘기가 오고 또 어느 날 철이 드는 건가. 그때부터 우리는 소박한 파티를 열었다. 바빠서 음식 할 시간이 없으면 먹고 싶은 걸 주문하고 음식에 어울리는 술을 골랐다. 친정에는 그런 문화 자체가 없었으므로 내게는 첫 경험이었다. 생일이란 한 살 더 먹으며 새로운 나의 해를 시작하는 첫날이기도 하니까 잘 지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생일이면 드는 울적한 기분을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노력은 할 수 있었다.


생일 당일을 함께 보내긴 불가능하게 됐다. 나는 서프라이즈에 재주가 없어 휴가 데리러 가기 전, 책상 위에 선물과 카드를 세팅해 두었다. 원래 금일봉 봉투에 편지를 쓰는데 카드가 추가됐다. 딸이 카드 문화도 만들었다. 나의 픽은 딸이 좋아하는 까눌레에 초가 꽂혀 있는 그림의 카드. 생일 주간에는 생일자가 좋아하는 걸 먹는다. 우리 집 생일 규칙이다. 한·중·일·양, 하루에 한 가지씩 골라 먹으며 잘 보내려고 애쓰는 사이 재수하고 있다는 것도, 재수생 엄마의 불안도 잠깐 잊는다. 내 부모가 풍족을 이루느라 하지 못한 것들을 크게 돈 걱정 없이 자란 나라서 딸에게 할 수 있는 걸 테니 잠깐 부모도 이해할 수 있다. 낀 세대라는 말이 있지만 대대로 낀 세대는 늘 존재했으므로 부모 자식 사이에 낀 시절이 더 적당한 말일지 모른다. 나는 낀 시절을 지나고 있다. 잠깐씩 그들을 이해하면서, 원망했던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마음에 짜증도 내면서 말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우리는 아주 잠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기숙학원으로 돌아가는 날,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생일 주간 마지막 식사였다. 좋아하는 카페에도 갔다. 조각 케이크를 하나 시켰는데 내가 한 입 먹었더니 생일날 못 먹을 자기 케이크라고 했다. 딸은 심각했는데 내게는 한없이 귀여운 투정이었다. 그 모습과 더불어, 책상 위에 놓인 선물에 많이 놀라는 척 해준 모습도 한동안 기억하기로 한다.


기다리던 30일이 왔다. 좀 울적할 수도 있겠다 했는데 늦은 저녁까지 수업하느라 감상에 젖을 겨를이 없었다. 집에 와서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태어나도 너를 만날 수 있다면 그럴 거야, 영원한 나의 딸, 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엄마는 5월의 봄을 사랑했고 5월에 꼭 너를 낳고 싶었어. 행복했으면 해. 네가 행복한 걸 보는 게 나의 행복이기도 하니까. 30일이라는 숫자를 꼭 마음에 들어 하는 엄마를 위해 12시 넘기지 않고 태어난 아이는 무사히 스무 살이 되었다. 어쩌면 떨어져 있어서 더 애틋할 수 있었던 생일 정각의 메시지. 엄마는 메시지를 보내며, 딸은 메시지를 읽으며 지었을 우리의 표정과 살짝은 슬픈 마음도 내 인생 한 장면에 추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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