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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놉니다

3부 여름 02

by 싱싱샘

여름학기 개강을 모두 마친 다음 날 현충일에도 수업이 있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금요일.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취소되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 나가서 춤이라도 출 만큼 체력이 충전된 기분이었다.


나는 집콕도 혼자 놀기도 수준급이다. 친구랑 여름옷이나 사러 갈까 하는 마음도 좋고 혼자 뭐 할까 하는 마음도 좋았다. 오랜만에 나랑 놀기로 했다. 선크림만 바르면 준비는 끝. 책 한 권, 블루투스 키보드와 펜 한 자루를 챙긴다. 이제 어디로 가도 좋아.


6월 되자마자 한낮 기온이 삼십 도를 넘었다. 여름볕 느끼며 딸에게 보낼 영양제를 사러 종로에 나섰다. 아이가 택배 보내달라고 한 목록을 읽는데 갑자기 이유 없이 심장이 지잉 울린다. 6월 4일, 대학수학능력시험 모의평가가 있었다. 9월 모평까지 석 달, 그러고 나면 11월 수능이 온다. 현실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두렵고 불안하다. 도망치고 싶어도 유일한 탈출구는 시간이 지나는 것뿐이다. 흘러가는 동안은 버텨야 한다. 그러므로 버티기만 해도 최고로 잘한 것이다. 그걸 깨달은 지도 얼마 안 되었다. (나는 그런 시간을 지나는 아이들 곁에서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역할을 오래오래 하고 싶었다.) 아이의 심장이 아니라 내 심장이 지잉 울리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조금은 힘들다. 떨어져 있는 엄마인 나는 생각을 덜 하며 사는 것 같았지만 심장이 신호를 보낸다. 아마도 하반기 닥칠 전쟁에서 나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무의식에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글은 늘 과거의 일이고, 현재조차 쓰는 순간 과거의 기록이 되겠으나, 지난 1월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받은 것 같았다. 불안하지… 쓰고 있으면 훨씬 괜찮아질 거야. 미래의 나에게 가는 길을 문장으로 놓는 일. 어쩌면 그것이 글쓰기 아닐까. 나에게 문장은 가장 안전한 징검다리였나, 잠시 생각했다.


가는 길, 오는 길 책 모임 게시판에 접속해 댓글을 읽고 달았다. 필요하면 늘 쓰면서 걷는다. 습관이 되었는데 이 문장을 쓰며 다시 안 그러기로 해본다. 6월의 하늘을 놓치기 때문이다.


당일 머리 예약이 될까. 버스 노선이 미용실을 지나 우리 집으로 간다. 머리를 하기로 한다. 미용실 원장님과의 인연이 어느새 십오 년이다. 다섯 살 소녀가 스무 살이 되는 걸 볼 수 있는 시간. 어른들이 이십 년만 고생하라고 한 말이 신기하게 맞았고 끝이 올 줄 몰라 힘만 들었던 날들도 있었다. 십오 년 전 내 머리숱을 기억하는 원장님은 정말 많이 줄었어요, 왼쪽 오른쪽 숱도 달라요, 말해준다. 원장님도 나이 들어가니 우리는 같이 웃을 수 있다.


가윗날 ‘사악’ 하는 소리와 ‘많이 짧아집니다’ 하는 오디오가 겹친다. 단발이 되었다. 사 년 만이다. 길이가 생각한 것보다 짧아졌다. 글쓰기 수업에선 아이들 눈이, 책 모임에선 어른들 눈이 커진다. 아이들이 딱 초코송이라고 해줘서 즐거웠다. 미용실에서 나오며 6월에 단발이라니 더워서 큰일났다, 대책 없이 잘랐나 하는 걱정이 스쳤다. 그런데 흔들리는 머리도, 묶인 머리도 없는 가뿐함에 감탄했다.


약국 갔다가 머리 하니 어느새 늦은 오후였다. 점심을 걸러 배가 고팠다. 이런 날 집에서 차려 먹는 건 너무하니까 제일 좋아하는 쌀국숫집에 가기로 했다. 똠얌꿍에 고수 넣어 후룩후룩 먹으니 향 좋고 새콤 칼칼한 것이 진정 꿀맛이다. 함께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행복이고 음식점에서 틀어주는 음악 들으며 먹는 데만 집중하는 것도 행복이다. 행복에는 종류와 장르가 많다. 커피 똑 떨어진 것 생각해내고 원두를 사러 가기로 했다.


내가 저녁 첫 손님일까. “여기 원두 맛있어요. 늘 잘 먹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 얹어드리고 커피 잘하는 집이니 아인슈페너를 시킨다. 원두는 묵직하고 깊은 맛으로 골랐다. 드립백을 서비스로 받았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다크 초콜릿, 메이플, 조청

진흙에서 피는 연꽃처럼

깊고 힘 있는 멋진 커피


이렇게 멋진 커피를 끊는 건 반칙이다. 창밖으로 초록잎 가득 매단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크지도 작지도 않다. 아인슈페너 위에 얹힌 크림이 입안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차고 쌉쌀한 커피가 목으로 넘어간다. 천국이다.


집에 돌아와 택배 보낼 물건 정리하고 요가 갈 준비를 했다. 파우치 하나만 들고 가 내 요가 매트 꺼낸 자리에 넣어둔다. 어딘가 가고 오는 길, 어깨에 멘 짐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 마음을 가볍게 하는지 모른다. 불 끄고 마지막 숨 고르는 시간, 선생님이 쳐주는 맑고 깊은 싱잉볼 소리, 한 사람씩 눈에 덮어주는 아로마 오일 뿌린 고슬한 수건 속으로 나는 빠져든다. 사람도 매력이 있고 책도 매력이 있고 운동에도 매력이 있었다. 아침에 가면 새 소리, 늦은 오후에 가면 해가 지며 색이 달라지는 풍경, 저녁에 가면 하루를 잘 마친 것 같은 마음 때문에 더욱 빠져드는 중이다.


그다음 주 월요일에는 차를 가지고 멀리 나갔다. 여름 치마, 티셔츠, 간절기 재킷 하나를 샀다. 옷을 고르고 커피를 마시고 나랑 놀다 왔다. 나이 들어갈수록 꼭 필요한 세 가지를 고독을 견디는 힘, 유연함, 유머라고 정해 두었었다. 최근 ‘여전히, 사랑’을 더했다. 나는 평생 고독을 잘 견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만 멀리 나가보면 안다. 돌아올 곳이 있고 사람이 있고 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혼자 있을 때 외롭거나 슬프지 않다면, 혼자서도 잘 논다고 생각했다면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집, 사람, 일, 종류도 장르도 다양한 사랑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랑을 딛고 혼자 노는 평화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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