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여름 03
내가 견디기 어려운 몇 부류의 사람이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 태도는 금세 드러나고 본성은 끝내 밝혀진다. 실수하는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에게는 너그러우려고 하는데 누구에게나 연약한 면이 있다는 걸 나를 보아서 잘 알기 때문이다.
견뎌지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서서히 거리를 둔다. 물리적 거리가 가깝더라도 마음은 멀리 둔다. 거리 두기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힘이다. 십대 시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학교에 다녔지만 얼굴만 그랬을 뿐 상처받은 아이 하나를 데리고 다녔다. 지금이야 아주 조금 단단해진 내공이 생겨 더는 크게 상처받지 않지만, 견디기 어려운 사람 옆에 있을 때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 쉬우므로 멀어짐을 택한다.
최근 INFJ는 마음속 삼세 번 후 손절, 문을 꽝 닫는 도어슬램이라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선이 분명한 사람이다. 상대에게 지키고 나 역시 지켜질 거라 생각하며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선을 넘는 순간 불편해진다. 내 약함은 여기서부터일 것이다. 거리를 두기 시작하며 마음이 빠르게 차가워진다. 하지만 티 나지 않는 가면을 쓰는 나를 상대는 알아채지 못한다. 모르니까 계속 선을 넘고 관계는 끝을 향해 간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상대 입장에서 얼마나 쉽지 않은 사람일지.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는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고 ‘사실, 나는’으로 시작하는 고백이 얼마나 뒤통수치는 말인지 딸을 통해서도 배웠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요즘 나는 말할 건 말해야 하나 고민한다.
같이 가야 할 사람이라면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내 마음의 차가워짐은 관계에서 주의를 기울이라는 신호다. 이삼십 대 나는 도어슬램이 특기였는데 성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은 내게 감정의 라벨링이 덜 되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었을 것이므로. 힘들었던 모든 순간은 그냥 ‘슬픔’으로 남았다. 그런 표현력으로는 관계가 버거웠다. 혼자 애쓰고, 알아주길 바라고, 상처받고, 그러다 도망치는 유약한 인간으로 남편을 만났다, 딸을 키웠다. 어쩌면 내 사랑보다 그들의 사랑이 커서 나는 달라졌다. 내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이르거나 지나치진 않은지 헤아리면서, 갈등이 예상되어 어려운 이야기가 될지라도 피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나는 관계에 있어 많은 실수와 실패로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여전히 누군가 나를 미워하는 불안을 견딘다. 완벽하려 애써도 완전무결은커녕 나이 들어가는 얼굴처럼 점도 흠도 티도 많다. 성격과 기질은 쉽게 바뀌지 않고 개인의 역사가 만든 오늘의 나는 마음대로 어째지지 않아 우리 모두는 조금씩 이상한 사람이다.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는 또 다르니 오늘 이 순간에 진실하려고 노력한다. 좀 못나도, 우아하지 못해도 솔직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부로 연민하는 사람, 배려가 지나친 사람은 위험에 빠진다. 감정이입이 쉽게 되는 나는 조심한다. 마음을 쓴 일이 많을수록 생색이 예비되어 있다. 배려 뒤편에서 무엇을 욕망하는지 들여다보려고 한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한 행동은 상처나 화가 되어 남는다. 과거의 나뿐만 아니라 약해지는 순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착한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 건강한 사람이길 바란다. 이상하고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