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여름 06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있다. 머리는 단발, 왼손에 가위가 들려 있고 종이를 신중하게 오리고 있다. 일곱 살의 가위질하는 나. 집중하면 나오는 입. 사진 찍힐 줄 몰랐기에 어쩌면 가장 나다운 모습일지 모르겠다.
최근, 친정에서 사진을 찾아 가져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딸이 기숙학원에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났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엔 기상 알람을 꺼놓는다. 쉬는 날은 일요일과 월요일인데 할 일을 하거나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집 밖으로 한 걸음도 안 나가려다 그건 너무한가 싶어 저녁에 요가를 다녀오기도 한다. 먹고 싶지 않다면 한낮 밥을 차릴 일도 없고 누워서 책을 읽든 그러다 잠들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 정리하고, 스위퍼 더스터로 먼지 한 번씩 닦고, 돌돌이 테이프 밀고, 청소기 돌리고, 아침에 먹은 것 설거지하고, 그러고 나서야 커피 한잔 내려 책상 앞에 앉았다. 어느 날, 이런 게 다 뭐라고 나는 매일 똑같이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쉬고 싶었다. 일할 기운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마음속으로 수업을 줄일 계획도 세웠지만 수업은 오히려 늘었다. 살면서 나를 붙든 손들이 알고 보면 내게 내밀어진 고마운 손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 따랐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뺄 수 없는 일정이라 일요일과 월요일만큼은 마음대로 쓰고 싶었다. 아무것도 돌보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 같았다. 마음의 에너지는 썼을지 몰라도 타인을 위한 몸의 에너지는 한 방울도 쓰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다. 죽은 듯이 가만히 있다가 하고 싶은 걸 했다.
가만히 있으면 죄책감이 올라왔다. 이 아까운 시간을 버리고 있네. 책 읽다 자고 밥 먹고 자고 무슨 잠을 이렇게 자나. 나가보려고 했는데 밤이 됐네. 종일 집에 있으면서 설거지만 만들었네. 그 설거지마저 안 했네. 죄책감은 내가 나한테 지우는 짐이었다.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투두리스트를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걸 계획 없이 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건 안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계획을 왕창 세웠다가 아무것도 안 해버리는 날들을 보냈다. 펑펑 낭비하듯 시간을 썼다. 가능한 한 혼자 있었다.
나는 자유로워도 됐다. 그럼에도 우왕좌왕했던 것 같다.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겠다고 계획을 세우는 꼴이랄까. 한 주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일을 몰아서 하고, 또 한 주는 힘에 부쳐 잠만 잤다.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줄도 모르고 6개월을 보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마음과 안 하고 싶은 마음 사이를 오갔다. 그럴 때에도 시간은 충실히 갔다. 시간만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내 부모가 삶으로 가르친 책임감 덕분에 잘 살기도 했지만, 책임감이라는 화분에는 죄책감이라는 씨앗도 함께 심겨 왔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은 죄가 아닌데 그걸 배우지는 못했다. 내가 그렇게 사는 동안 주변 사람 모두 열심히 책임지는 사람으로 채워졌다. 내가 그중 1호 베짱이가 되어야 할 텐데. 웃긴 건 베짱이도 밤낮없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물이 똑똑 떨어진다. 컵을 채우려면 한참이나 걸릴 것 같지만 반드시 채워진다. 표면장력을 뚫고만 한 방울 덕분에 물은 넘친다. 흐른다. 흐르기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흐르면서 비로소 채워졌다는 걸 알게 된다. 지난 6개월이 나에게 어떤 시간이었는지 몰랐는데 깨닫는 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 걸까.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 년간 기른 머리를 잘라서도 그렇고 옷차림이 달라져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마음이 달라져서였을 것이다. 올봄이었을까, 지난겨울이었을까. 나도 내가 너무 지겨워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선언이 됐다. ‘열 번, 백 번 생각하던 것 올해는 딱 세 번만 생각하고 결정할 거야.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더 생각하지 않고 신경도 안 쓸 거야.’ 전전긍긍하던 마음 절벽에서 마치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 하고 손을 놓아버리는 심정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그 문장이 내 두 번째 자아라도 된 듯 척척 결정했다. 물론 자기 전에 이불 덮으며 곱씹기는 한다. 이제 그것도 딱 세 번만 하고 끝내기로 해본다.
글쓰기의 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대단한 글을 쓰려고 한 적이 없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가 주제가인 나는, 나 한 사람 이해하는 것이 목표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를 잘 지켜보겠다는 것이 올해 글쓰기 목표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내놓으면 내놓을수록 초라해지기는커녕 나를 긍정하기에 이른다. 정확히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가 깊어지면 공감하게 된다는 진리가 스스로에게도 통한 것이었을까. 쓰는 만큼 나를 알았다. 일을 제외하면 영 헛똑똑이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 진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 그 모습이 나약하고 몇십 퍼센트 부족해도 상당히 귀엽다는 것. 그런 채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 삼십 년쯤 되어야 어떤 사람이 온전히 편안해지기 시작하는,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사람. 나는 힘들 때마다 그 모습 그대로 글을 썼다. ‘가지런히 정리된 한 사람의 기록’ 《쓰기의 말들》 은유, 유유 으로서의 글을 추앙했다.
마음을 비집고 솟아난 싹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이 쓰기다. 그 감정이 어떤 땅에서 자랐는지 살펴보면 상황과 사건이라는 뿌리가 있다. 그 뿌리를 헤집어 보는 것이 쓰기다. 그러고 나면 실체의 일부를 알게 된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기도 하고 고민을 털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도 한다. 나와 마주하는 쓰기는 그래서 두렵기도 하다.
어른은 크고 작은 사건을 겪은 사람이다. 시간을 견딘 자들이다. 나는 나무처럼 조금씩 옮겨졌다. 분갈이할 때마다 몸살을 앓았지만, 정착했고, 자랐다. 분갈이가 덜 두려워진 나는 좀 살만해졌다고 - 마음이 단순해져 - 하고 싶은 게 많다. 서툴렀지만 혼자 보낸 시간, 입을 삐죽 내밀고 가위질에 집중한 일곱 살 어린이 같았던 날들, 망치고 버려지기도 한 시간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도 여러 가지라 어떤 모습이 나다운지 단정하지 않고 지냈다. 누워서 책을 읽다가 잠에 든다면 나도 책 속 인물들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직으로 받던 중력을 수평으로 분산해 받게 되는 걸까. 사이좋게 누웠던 그 시간이 나를 일으킨다. 평안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걸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 마음과 하고 싶지 않은 걸 하기 싫은 마음 중에, 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말아 보라고, 하고 싶은 게 정말 하고 싶었던 건지 확인해 보라고, 혼자 가만히 있어 보라고 내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균형 감각을 찾는다고 믿는다. 그건 개미도 베짱이도 못 해낸 것이다. 근거도 없이 괜찮을 것만 같은 마음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해보는, 버려진 것 같은 시간을 지나서 온다. 그 누구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목소리로 ‘괜찮을 거야.’를 들은 뒤에 괜찮아진다. 이 시간을 나는 ‘에라, 모르겠다의 시간’이라 부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