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여름 13
글쓰기 모임을 마무리했다. 기획은 일 년이었는데 곧바로 책을 낼 계획이 없다면 여기서 멈추고 각자 한 학기 경험한 대로 글 쓰며 나아가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정리하고 나니 사랑했던 시간이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아낌없이 나의 시간을 쓰는 일이라는 것도. 게시판에 마지막 공지를 올렸다. 비공개 밴드에는 다시 나만 남게 되었다.
작가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언제 처음 읽었던가. 신간 《사라지는 것들》이 나왔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꺼내 읽었다. 기억이 사그라든 후의 재독이어서 더욱 감탄했다. 단편을 유독 잘 다루는 작가가 몇 있다. 나는 어어, 하고 끝나버리는 단편의 단면을 사랑한다. 글에 온도가 있다면 서늘함을 사랑한다. 글에 습도가 있다면 건조함을 사랑한다. 앤드루 포터의 글이 그러하다. 책 모임 방학하고 내처 책을 읽었다. 1800년대로 갔다가 2024년으로 왔다가, 1946년에 태어난 작가의 스무 살 적 이야기를 따라 1960년대로 갔다가 다시 21세기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요가도 한 주는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모인다는데 잔기침을 핑계로 거절하고 틀어박힌 건 마음이 힘들다는 신호였다. 나, 왜 힘든가.
작년 이맘때 떨리긴 했지만 희망이 있었다. 대학 수시모집 접수를 앞두고 담임선생님과 상담하며 여섯 장의 원서를 조정해 나갔다. 고3 아이들은 입학 후 열 번의 정기고사로 지친 상태였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수록,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할수록 희망은 커졌다. 희망은 너무도 아름다웠으나 수능 앞두고 바뀐 문제 유형과 높아진 난도로 최저등급을 맞추지 못한 수험생이 너무 많았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 채 3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소설 같았다. 소설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로부터 한 바퀴 돌아 다시 8월이 되었다.
고3 담임선생님이 장문의 메시지를 주셨다. 마침 기숙학원에 있는 딸과 지원 대학을 놓고 두 차례 통화한 직후였다. 재수하면 당연히 더 잘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훨씬 고려할 문제가 많다고 말해주고 싶다. 재수 수시가 그렇고,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되는 정시는 늘 어렵다. 재수생이지만 다시 단 한 번의 시험이 되니까.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나는 딸과의 통화에서 수능 90일 전 하나의 유령이 기숙학원을 떠돌고 있음을 감지했다. 입시를 함께 치른 부모와 자녀는 마음을 공유한다. 기본적으로 경쟁률을 봐야 하고 모집 인원이 몇 명인지, 충원율은 몇 퍼센트나 되는지, 어떤 서류들이 접수될지 예측할 수 없으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고3 아이들이 희망을 바라볼 때 다시 한번 도전하는 아이들은 현실을 직시한다. 8월은 그런 달이다.
단문으로 끝나지 않는 긴 이야기들. 담임선생님은 내가 아이에게 전달할 것을 고려해 조언을 메시지로 주신다. 선생님이나 나나 문장으로 의견 주고받는 일에 능숙하지만, 선생님의 염려와 나의 불안은 능숙하게 감춰지지 않는다. 책상 위 A4 용지에는 아이와 통화하며 적은 메모가 빼곡하다. 두 가지 두려움이 있다. 3년 내내 잘만 맞춰 왔던 최저등급을 수능에서 맞추지 못했다. 지원한 대학에도 모두 떨어졌다. 불볕더위에 아무 생각이 없을 법하건만 나는 지원이 예상되는 몇 개의 대학과 학과를 되뇌고 있다. 인생에서, 왜 나만, 이라는 것이 없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나는 나도 몰래 운다. 내 인생보다 어려운 까닭은 자식의 고통과 불안을 지켜봐야 한다는 데 있다. 나는 또 한번 어른이 되는 중이다. 고통을 겪는 일만큼이나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은 사람을 성숙되게 한다. 어쩌면 성숙하다는 애초에 불가능한 단어다. 성숙은 할 수가 없다. 피동으로 속수무책 당한 후에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글쓰기 모임을 마무리하며 아쉬움이 남았다. 경험이라 하기엔 짧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결정했다. 글을 대하는 마음 하나 씨앗처럼 심었다. 책 모임을 운영하며 나아갈 길을 알지만 조금씩밖에 갈 수 없어 답답할 때가 있다. 함께 걷는 속도는 그렇다. 이 모든 일을 예상하고 받아들이고 처리하는 나는 경험이 풍부한 선생님이다. 그렇지만 엄마인 나는 겨우 성년을 맞이해 안절부절못한다. 누가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나. 많이 듣지 못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숨이 막 안 쉬어진다. 매 순간 옳은 선택을 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그러다… 인생의 힘든 일이 겹친 지인의 소식을 전하는 친구와, 참담한 마음으로 말없이 헤어진 날을 떠올린다. 눈물이 나고야 만다. 우리가 계속 가는 일밖에 인생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