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보내며 2019. 4. 2.
나는 글쓰기 선생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아이들을 가르친다. 화요일 오전과 목요일 오후에는 어른들을 만난다. 매주 책 한 권을 읽고 한 달이 지나면 글 한 편을 쓴다. 나도 글을 발표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빈 보따리 옆에 끼고 한 달여 글감 찾기에 고심한다. 학부모 상담도 종종 한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는 읽고 쓰는 것, 정 바쁘면 읽는 것만이라도 놓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어른들과 하는 독서 모임 이름은 심지어 ‘살아갈 날들을 위한 읽고 쓰기’다. 어쩌다, 내가 읽고 쓰기 전도사가 된 걸까. 내가 읽고 쓰는 글은 어떤 쓸모가 있는 걸까.
십여 년 전, 나는 잠실의 어느 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일기 몇 줄 쓰게 하기가 책 한 권 쓰는 것만큼 어려웠던 한 엄마는 내가 운영하는 글쓰기 교실에 아들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글 분량이 쭉쭉 늘었다. 나는 가르치면서도 신기했고. 내가 겪은 일을 쓰는 게 어려운 일인가. 한 건 한 대로, 본 건 본 대로, 들은 건 들은 대로, 말한 건 말한 대로, 느끼고 생각한 건 느끼고 생각한 대로 쓰면 되는데 말이다. 아이들에게는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는 거라고 가르쳤다. 그 장면으로 돌아가 보이는 대로 쓰면 된다고,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차근차근, 차례대로, 를 주문했다. 혼자였다면 지루할 일을 친구와 함께 하니 재미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려워하지 않아 나도 힘을 얻었고 학교에서는 글쓰기 실력이 유용하니 내 말에는 힘이 생겼다.
거슬러 십구 년 전, 나는 일주일에 하루는 꼬박 밤을 새워 글을 썼다. 방송 자막에 스치듯 이름 석 자 들어가는 일이었지만 글을 쓰고 고치는 밤의 시간이 좋았다. 그 경력을 이어 어린이 교재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가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원고를 썼다. 함께 일하는 작가의 원고를 검토하고 교육계획안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 결과물이 나왔다. 내 이름은 기획개발자였다. 글쓰기 책 서두에선 늘 말한다. 당신은 쓰는 사람인가, 쓰고 싶은 사람인가. 나는 쓰고 싶은 사람이었고 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쓰는 자리에 오래 있지 못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멀티가 안 되는 나, 인정받아야 하고 성에 찰 때까지 일해야 하는 나. 마찰이 계속됐다. 아주 잠깐 쉬었지만 즐겁지 않았다. 육아에는 휴식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오면 에너지가 바닥났다. 나는 두서없이 말하는 게 싫은데 말하지 않으면 어색해서 말했다. 내 말에 취해 말하곤 후회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글쓰기 교실을 열게 되었다. 내가 아는 모든 걸 씹고 소화해 아이들에게 전했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고 함께 웃었고 어른이 아이를 함부로 대하는 이야기에는 같이 분노했다. 나는 살아났다. 잠실 그리고 목동, 작은 도서관으로 날아다니며 쓰는 사람에 대한 열망을 잊었다. 가르치는 시간이 좋았고 그들의 글을 읽는 것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어느 날 잠에서 깼다. 몇 년간 잠든 나를 깨운 건 왕자님의 키스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쓰며 발전하고 자라는데 선생인 나는 왜 아무것도 안 쓰고 있지. 쓰고 싶다는 파도가 몰려왔다. 국민학교 때 바다에 갔다. 도착한 첫날 파도에 안경을 잃어버려 사흘 내내 모든 게 희뿌옜던 기억이 있다. 파도는 몰려왔고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았다. 미친 듯이 쓰고 싶어졌다. 함께 읽고 쓰는 사람만 있다면. 혼자는 자신이 없었다. 어느새 쓰고 싶은 마음만으론 쓸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어린 나는 서울로 돌아와 새 안경을 맞췄을 것이다. 김봉사 눈 뜨듯 환해졌을 것이고. 그랬던 것처럼 기적같이 만난 글쓰기 모임에서 매주 글을 쓰며 나는 다시 쓰는 사람을 꿈꿨다.
잘 쓰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밖에 못 쓸까. 좁고 얕은 사유. 한 걸음 더 가면 작위적이었고 덜 가면 솔직하지 못했다. 남의 글에 밑줄은 잘 그으면서 나는 그런 문장을 쓰지 못했다. 밑줄 친 문장이 내 문장이 되지 않았고 그들의 사유도 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읽는가. 쓰면서 좌절했다.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 쓰고 싶은 마음이 쉬이 꺼지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잘 쓰고 싶었다. 친구는 말했다. 원래 이유 없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이유가 있다는 건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계속할 동기가 없는 거니까. 나도 그냥 잘 쓰고 싶었다. 어른들을 위한 읽고 쓰기 모임을 진행하며 나도 글을 내기로 했다. 안 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쓸 구실을 이어갔다.
나는 무엇을 그토록 말하고 싶은 걸까. 나의 일상, 나의 마음, 나의 생각, 나의 슬픔, 나의 고통. 결국 나는 나를 잘 쓰고 싶다. 글을 쓰면 다정하지만 냉정하고, 한없이 이해하지만 칼같이 자르고, 인정받길 원하면서 거리를 두는 내가 나타났다. 옳고 그름을 따졌지만 늘 옳진 않았다. 인생에 가면이 여러 개 필요했고 많을수록 편했다. 문제는 벗어던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을 붙들고 있으면 편안하고 후련했다. 내놓기 전까지 나는 완벽히 내 편이었다. 《고종석의 문장》을 다시 읽다가 무릎을 쳤다. ‘누구에게나 자기애가 있거든요. 나를 완전히 다 털어서 내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본능이 글 쓰는 과정에 개입해서 자신의 가장 추악한 부분, 가장 비루한 부분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겁니다.’ 맞다. 나도 글도 애초에 정직할 수 없는 거였다. 더 밀고 나가면 좋겠지만 정직하지 않다는 걸 아는 시간, 추악함과 비루함을 내게 묻고 땅에 묻는 시간, 나의 글쓰기는 거기가 자리다. 사람보다 꽃이 아름답고 사람보다 그래도 글이 아름답다. 끝내 남기고 다듬을 수 있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비로소 알았다. 나는 아름답고 싶다.
다시 묻는다. 나는 쓰고 싶은가, 쓰는가. 필일오必日五라는 말이 있다. 매일 원고지 다섯 매 쓰는 걸 말한다. 그렇다면 여전히 쓰고 있지 못하다. 매일 쓰는 사람이고 싶으나 한 달에 두어 번 쓰는 사람이다. 그런 글도 쓸모가 있을까. 일기 쓰고 독서록 쓰고 수행평가와 자기소개서, 프레젠테이션 준비하는 것이 글의 쓸모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무용하다 해도 나는 쓰고 싶다. 긴 호흡으로 내 추함과 너절함 확인하고 싶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화장하듯 쓰고 꾸민다. 맨 얼굴을 읽어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잘 쓴 글이란 결과물이 아닐지도 모른다. 글쓴이에게는 쓴 시간, 독자에게는 읽은 시간만큼의 쓸모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떤 글이든 잊힌다. 다만 그 시간만큼은 남는다. 이제야 나도 글도 조금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