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끝내주는 인생

4부 가을 06

by 싱싱샘

아침 기온이 처음으로 10도 아래로 내려간 날이었다.


오늘 나의 보호자는 친구 C. 그녀는 나보다 먼저 수술을 했다. 여전히 6개월에 한 번 검진을 받는댔다. 수술한 후 얼굴 보러 간 병동 앞 창가만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서른아홉인 우리는 젊었다. 더 늙어질 나를 위해, 수술하고 사진 한 장 남겨놓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친구를 기다렸다. 약속한 시간 정각에 친구가 도착했다. 부잣집 사모님처럼 차려입고 말이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니 노 교수님이 고개를 든다. 그러다 뒤따라온 C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고 또 반가운 얼굴이 된다. “아니, 어쩐 일이야…” 병원에서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토록 무섭구나. “친구예요.” 원래도 친절하다는 선생님이 더없이 다정하다. 영상 모니터를 내 쪽으로 보여주시고, 잠깐 침묵. 우리 둘은 선생님 입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침을 한 번 삼켰을까.


병원을 옮겼다. 진단이 다르지 않다. 복강경 권위자인 선생님은 어느새 육십 대가 되었고 나는 그의 손을 유심히 바라본다. 수술하기로 결정하고 금방 집에 갈 줄 알았는데, 수술 전 단계인 호르몬 주사 맞는 일정을 정하느라 진료실 앞에서 소파에서 이십 분을 보냈다. 수술은 3월 첫 주가 되었다. 3월은 새 학기고 4월 정기고사 보는 학생들에겐 시험 대비 기간이지만 그래도 새봄이다. 내게도 새봄, 새 몸, 새 출발이 될까. 인생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수술 날짜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이슬아 작가의 책 《끝내주는 인생》에 보면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의 정희진 선생님이 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 〈머니볼〉 타자 저스티스와 일루수 해티버그의 대화다.


“뭐가 제일 겁나?”

“공이 내 쪽으로 오는 거.”


‘야구에서 공을 가장 많이 받고 잘 다루어야만 하는 일루수가 공이 자기한테 올 때 가장 무섭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저스티스가 장난치지 말고 말해보라고 하지만 해티버그는 ‘진짜’라고 한다. 정희진 선생님은 이 장면에 울었다고, 그건 자기가 하는 일이 감당이 안 된다는 얘기라고 했는데, 듣는 이슬아 작가는 별안간 가슴이 미어지고, 읽는 나도 순간 먹먹해졌다.


‘직업이든 공부든 생계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요. 회피할 수 없는 일, 회피하면 모든 게 무너지는 그런 일이 누구한테나 있어요. 일루수한테 공은 그런 거죠. 그런데 그 일이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희진 선생님의 말이다. 나는 초록 포스트잇을 붙여오다 빨간색을 하나 뚝 떼어 붙였다. 회피하면 모든 게 무너지는 그런 일, 삶에는 그런 일이 있다. 그런 일을 감당하며 산다. 누군가의 뇌가, 위와 허리가, 심장과 가슴이. 그런데 그러면서 산다. 어느 날 작은 기쁨을 선물로 받기도 한다. 그것도 알게 되었다. 이슬아 작가의 할머니는, 이슬아의 친구가 망해서 빚이 산더미라고 해도 ‘그런 거 가지고 망했다고 하면 안 댜.’ 하는 분이니까 내게도 그런 거 가지고 망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걸 경험 많은 의사 선생님은 ‘이 병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수술’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가장 안심됐다.


나는 현재가 중요한 사람이다. 오늘에 욕심낸다. 수술 후에 얼마나 쉬어야 할까. 여전히 내 일들을 잘해 나갈 수 있겠지? 겪어보지 않은 날에 대한 보통의 두려움이다. 여기까지 와서야, 결론을 내린다. 그 정도라면 되었다. 시기마다 새로운 문제가 배달된다. 눈 뜨면 배달되는 것도 있고 일 년 혹은 십 년에 한 번 오는 것도 있다. 이렇게 오십 년 만에 배달 받는 일도 있었네. “우리 의사 빽 없으면 수술한 환자 빽이라도 써야 되는 거지?” 나는 농담하며 받는다.


친구 C가 걸어오는데 병원 복도가 다 환하더라는 내 말에, 친구 Y가 오! 환자 기죽이지 않으려고, 보호자 노릇 톡톡히 했네 그랬다. 강남고속터미널 상가에서 꽃을 사들고 나타난 Y까지 셋이 배불리 밥을 먹었다. 오후면 품절되는 빵을 사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겨울용 에코백과 흰색 셔츠를 샀다. 기꺼이 한나절을 내어준 친구들로 보호받는다. 12월부터 주사를 맞겠지만 후유증이 있어도 삼 개월이라는 정해진 날이 있다는 위안도 함께 받는다. 낮 기온이 훌쩍 오르고 바람은 불지 않아서 걸으면 등이 따스한 날이었다. 감나무에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렸다. 한동안 그럴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