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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체의 진심

1부 겨울 04

by 싱싱샘

친정아버지와 통화할 일이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딸 데리러 간다고 했더니 경기도에서 서울 오는 버스 많은데 뭐 하러 가냐 하신다. 다 컸는데 혼자도 와야지.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문제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데리러 가는가. 한 달을 기다린 마음, 보고픈 마음. 한 달을 기다렸을 아이 마음, 당연히 데리러 올 거라 생각하는 아이 마음, 엄마가 보고플 아이 마음. 그 모든 마음을 아는 내 마음. 아버지와 나는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사이라, 어우… 공감능력 빵점 아닙니까, 서로 웃고 말았지만 실은 그랬다. 그 말이 나를 붙들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데리러 가는가.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데리러 가지 않는가. 45년생 아버지, 74년생 딸. 그 마음은 세대 차이일까 아니면 개인의 차이일까. 쉽사리 결론 내지 못하겠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나는 나대로 ‘모두가 그럴 수 있지.’라는 게 요즘 내 마음이다. 그런데 아버지도 그럴까.


아버지와 엄마는 나 열 살부터 스무 살까지, 두 사람 사십 대를 전후로 대단하게 싸웠다. 나는 도망갈 데가 없어 이불 속에서 참 많이 울었다. 싸우는 사람들은 정작 듣지 않는데 싸움을 듣는 사람은 숨죽여 운다. 누가 가르친 적도 없는데 이불에 들어가 운다. 누군가 그런 집 많아, 괜찮아, 네 잘못 아니잖아, 네 삶을 살아, 대신 잘 살아야 돼, 그중 한마디만 해주었어도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다 그만해! 이제 이혼해! 나가버려! 소리친 날이 빨리 왔을지 모른다. 소리가 터져 나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그 시간만큼 내 마음은 이불 속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통화하고 나서 맞아, 나는 내 마음을 이해받으며 자라지 못했지. 내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지. 그들의 삶은 전쟁터였다. 나는 청소년기를 전장에서 버틴 셈이 된다. 끄덕끄덕 내가 나를 이해하기로 한다.


딸아이 초등학교는 혼자 걸어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어서 내가 데리러 갔다. 일 때문에 가지 못하는 날은 친정엄마가 가기도 했다. 막 3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가 말했다. 엄마, 애들도 버스 타고 가는데 나도 버스 타고 가볼래. 그래? 그럼 버스 타고 와볼래? 그때부터 초등학교 졸업까지 아이는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처음 버스 탄 날 스스로를 대단히 여겼을 게 틀림없다. 나는 아이 말에 귀를 잘 기울이면 된다고, 내가 나의 양육 방식을 믿고 지지하기로 했을 것이다. 야, 할아버지가 말이야, 라고 시작된 나의 뒷담화 같은 메시지에 아이는 이렇게 답을 남겨 주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를 아직 기억하다니. 맞아, 그랬었어. 내가 뭔가 말하기 전까지는 늘 엄마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방법으로 날 챙겨줬었지.’


겨울학기 책 모임 마지막 책은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었다. 우리는 한 계절에 세 권의 책을 읽는다. 이번 계절에는 사유와 문장에 관해 공부하며 《다정소감》, 《숨그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읽었다. 요즘 가장 잘나가는 사십 대 에세이스트 하면 김혼비를 뺄 수 없고 헤르타 뮐러는 ‘응축된 서정성과 진솔한 산문’을 인정받아 2009년 노벨상을 수상했다. 비극은 시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작가 스스로 말하기도 했으니 그녀의 문장이 어떠할지 상상할 수 있다. 신형철 평론가의 사유와 문장이야 책 좀 읽었다 하는 분들은 익히 알 것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그의 2018년 산문집이다. 평론보다는 훨씬 쉽지만 그래도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책도 읽어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에 우리는 열심히 나눴다. 열여덟 명의 밀도 높은 북토크는 일회독을 재독, 삼독한 만큼 이해하도록 만드는 저력이 있기에 그랬다.


바로 그 겨울학기 모임이 종강을 했다. 그리고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나라고 우리 딸이 이제 이렇게 대학에 가게 되었어요,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재수하게 된 걸 어쩌겠나. 눈물을 조금 그치고 보니 이런 시기는 그저 지나가야 한다. 지나봐야 알기도 한다. 그래서 밀고 나간다. 내게 밀고 나가는 방법이 글이다. 글쓰기다. 편지지는 분명 하얀색이었는데 그분 특유의 밝음으로 물들어 온통 핑크빛이다. 나의 힘듦을 함께 아파하는 말, 곁에 있음을 기억해 달라는 말, 책 모임 방학 끝나고 봄에 만나자는 약속의 말, 상상도 안 해본 손편지는 신형철 평론가의 글 〈문어체의 진심〉이 참 좋아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책을 다시 폈다.


‘손편지라는 것은 왜 별 내용이 없어도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편지는 문어체의 공간입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다섯 줄짜리 편지라 해도 일단 편지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이의 말투는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양식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문어체의 공간 안에서만 비로소, 구어체로는 담을 수 없는, 그 자신도 몰랐던 진심이 발굴되고 심지어 생산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문어체만의 특별한 힘이라고 할까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한겨레출판


나도 문어체의 진심을 전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돌아서니 블로그 글 하나에 긴 댓글이 비공개로 달려 있다. 개인 사정으로 만나지 못하는 책 모임 멤버 한 사람의 안부 인사다. 너무도 공감되어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글을 남긴다는 그분과 나는 그 댓글 하나로 블로그 이웃이 되고 글 친구까지 되어버렸다.


내내 투덜대는 중이었다. 나 좀 봐달라고. 나 힘들었다고. 내 경우 그런 마음은 옳은 말의 옷을 입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깃까지 세운 채 전투태세를 갖추게 한다. 그런데 등 토닥임도 손 내밂도 아닌 와락 안아줘버린 문어체의 진심들. 누군가의 마음 씀, 애틋함을 이길 순 없는 것이다. 깃을 내리고 단추를 풀고 나는 자리에 앉는다. 딸과 매일 한 통씩 주고받는 편지도 어쩌면 문어체의 진심이었겠구나. 그래서 더 좋았던 거구나. 어느새 나는 딸에게 행복하다고 쓰고 있었다. 삶의 줄거리가 아닌 행간을 읽고 쓰고 싶다. 딸은 과연 내년에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돌보는 감각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줄거리라면 행간은 오늘일까.


신형철 평론가의 글은 이렇게 끝난다.


한국어가 서툴렀던 이성자 화가가 쓴 편지의 따뜻한 인사를 되돌려드립니다.

봄이 곧 문을 두들길야고 핪니다. 이것만 하여도 희망에 늠칩니다.


너무 좋아서 다시 옮겨본다. 화가 났던 내 삶의 한 줄 행간을 읽는다. 봄이 문을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희망에 넘친다는 것. 그러면 좋겠다. 곧 봄이 문을 두드리려고 하니까. 나는 내일 나의 소녀를 데리러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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